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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세계의 분쟁지역(이원표)

(23호) 포기할 수 없는 식민지, 아일랜드

포기할 수 없는 식민지, 아일랜드

세계의 분쟁지역 ⑥


종교분쟁? 민족분쟁?

영국본토(그레이트브리튼섬)의 서쪽에 위치한 아일랜드섬은 오랜 기간 영국의 식민지였다. 12세기 중엽에 영국왕 헨리2세에 의해 정복되어 1922년 자치권을 획득할 때까지 영국의 지배를 받았고, 아일랜드 독립 이후에도 북부 6개주는 영국에 잔류하기를 희망하여 현재까지 분쟁 지역으로 남아 있다.
분쟁의 기원은 어디서 찾아야할까. 물론 영국에게 정복되어 지배를 받게 되면서 아일랜드 주민은 많은 차별을 받아왔고, 현재의 아일랜드 주민의 가난은 그 역사의 그늘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마치 카톨릭계 주민과 프로테스탄트계 주민 간의 종교적 분쟁처럼 보이지만, 사실 수백년 동안 아일랜드의 카톨릭계 주민들은 차별과 억압을 받아왔다. 그로 인해 이미 두 계층은 사회적 격차로 인한 갈등이 내면화되었고, 그것이 종교적인 영향으로 표면화되었을 뿐이다.
영국에 정복된 아일랜드는 16세기 헨리 8세가 로마 교황과 대립하여 설립된 영국국교회(프로테스탄트)로 개종을 강요당했고, 17세기부터는 제임스 1세가 영국계 주민을 북아일랜드로 대량 이주시키면서 북아일랜드는 프로테스탄트계 주민이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현재 아일랜드 전체로 보면 카톨릭이 90%를 차지하고 있지만 북아일랜드는 프로테스탄트가 60%가 넘는다.
그리고 본래 영국은 켈트인의 땅이었다. 기원전 5세기부터 켈트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뒤에 건너온 앵글로색슨인이 켈트인의 땅을 정복해 들어갔다. 결국 켈트인들은 현재의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그리고 아일랜드로 쫓겨 갔다. 영국을 시작으로 유럽의 켈트인은 앵글로색슨인에게 정복되어 동화되어 갔는데, 그래서 아일랜드는 유일하게 남은 켈트인의 섬이 되었다.
이렇게 오랜 기간 정복에 의한 지배-피지배 관계가 고착되고 그것으로 인한 사회적 격차와 갈등이 종교적 영향 하에 표출되어 현재까지고 분쟁이 지속되고 있다.



아일랜드의 독립,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 국제적으로 고취된 민족독립 기운에 힘입어 아일랜드는 독립을 선언한다. 이후 삼 년간의 독립전쟁을 거쳐 자치권을 획득했는데 문제는 프로테스탄트계 주민이 많은 북동부 얼스터지방의 6개 주가 영국령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곳은 영국에서 이주해 온 주민이 많은데다가 영국이 집중적으로 투자해 온 지역이었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포기하기 힘든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북아일랜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의 지배-피지배 관계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영국이 제시한 6개주를 제외한 분리독립에 대해 독립을 지도하고 있던 신페인당과 아일랜드 의용군이 갈라서게 되었다. 결국 이 문제는 내전으로 번져 이듬해인 23년에 타협파가 승리하여 아일랜드는 6개주를 제외하고 독립하게 되었다. 1937년에는 독자적인 헌법을 만들어 정식으로 독립을 완성했고, 1949년에는 연영방에 탈퇴했다. 그러나 남겨진 북아일랜드에서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고, 내전에서 패배한 아일랜드 의용군은 이후 아일랜드 공화군(IRA)으로 거듭나 북아일랜드를 포함한 완전 독립을 위한 활동을 시작한다.



IRA와 테러, 피해자는 가해자로

할리우드의 많은 액션영화는 IRA(아일랜드 공화군)를 테러조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IRA가 폭탄테러 등 다수의 테러사건의 주인공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아일랜드에서 IRA만 테러를 하는 것은 아니다. 얼스터 의용군(UVF), 얼스터 자유전사단(UFF), 얼스터 방위협회(UDA) 등 프로테스탄트계 무장조직의 테러활동으로 많은 희생자가 나오긴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무기를 소지하지 않는 영국 경찰과는 대조적으로 얼스터 경찰은 권총을 휴대하면서 아일랜드(카톨릭) 주민들에 대해 공공연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어 분쟁의  책임을  IRA로만 돌릴 수는 없다.  얼스터는 아일랜드 북부의 9개 주를 통칭하는 것으로 현재 이 중 6개 주가 북아일랜드이다.
IRA는 1차 세계대전 중 아일랜드의 분리독립을 위해 무장봉기한 아일랜드 의용군의 후신이다. 당시 아일랜드 의용군의 봉기는 영국에 의해 진압되어 지도자 십여 명이 총살형 되기도 하였다. IRA의 활동은 60년대 말부터 활발해져 90년 대 초까지 양 측 희생자가 3500명에 달했다. IRA가 본격적으로 테러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69년 ‘오렌지데이’의 충돌이다. '오렌지데이‘는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를 기리는 프로테스탄트계 주민들의 축제인데, 이 때 양 주민간에 큰 충돌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IRA는 프로테스탄트계와 얼스터경찰을 상대로 한 테러를 본격화한 것이다. 이에 대해 영국은 북아일랜드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북아일랜드의 중심도시인 벨파스트에는 양 주민의 거주지를 나누는 철조망까지 생기게 되었다. 72년에는 카톨릭 주민들의 공민권 제한(일정한 선거구에 거주 제한 등)에 항의하는 시위가 이어졌고, 여기에 영국군이 발포하여 10여명의 주민이 사망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졌
다. 존 레논이 Bloody Sunday라는 노래로 발표한 이 사건은 아직도 아일랜드 주민의 가슴에 살아있다.
IRA의 테러만 부각되어 있는 아일랜드 분쟁은 이렇게 폭력의 희생자가 테러라는 방식을 선택하고, 그 테러에 대해 애초의 가해자가 국제사회에 호소하여 자신을 방어적 폭력으로 명분화하는 전형적인 ‘테러-반테러’ 공식에 의해 전개되었다.



평화와 분쟁 사이의 긴장

테러와 반테러 간의 끔찍한 폭력으로 많은 수의 주민이 희생되고 나서야 평화를 바라는 기운이 높아져갔다. 그리고 드디어 94년에 IRA와 프로테스탄트계 무장조직 간의 정전이 선언되어 평화로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러나 영국의 집권당이었던 보수당이 IRA의 정치조직인 신페인당의 협상참여를 거부하여 양 측의 무장해제 교섭이 결렬되었다.
그러나 97년 노동당 정부의 집권으로 사태는 호전될 기미를 보였다. 노동당 블레어 총리는 IRA의 정전을 조건으로 신페인당의 참가를 인정했다. 프로테스탄트계 최대 정당인 얼스터 통일당도 블레어 총리의 제안을 받아들여 평화 합의가 성립하였다. 그리고 99년 12월에 장치정부가 탄생하여 첫 총리로 얼스터통일당의 트림블이 취임하였다.
영국은 노동당 정부의 집권 이래 북아일랜드 주권의 귀속을 북아일랜드 주민의 손에 맡긴다는 전향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는 하나의 유럽이라는 EU의 흐름에 맞추어 개별 국가에 구애되지않겠다는 새로운 해결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에서는 카톨릭계 주민과 프로테스탄트계 주민간의 사회적 격차와 갈등이 존재하고, 여전히 IRA가 이를 기반으로 하고고 있어 긴장감은 없어지지 않았다.
급기야 IRA의 무장해제가 순조롭게 이뤄지지 않자 자치권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고, 트림블 총리는 IRA에 항의하며 총리직을 사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평화는 소망이 아니라 현실

2005년, IRA는 역사적인 무장투쟁 포기선언을 했다. 테러조직이 스스로 테러를 포기하면서 다른 방식의 투쟁을 선언한 것이다. 911테러 이후에 세계적으로 반테러운동이 거센 가운데 이루어진 선언이어서 중요한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여전히 IRA 내부 과격파가 남아있어 이들은 스스로 리얼IRA라는 이름으로 테러활동을 포기하고 있지 않다.
이들이 그렇게 남을 수 있는 이유는 여전히 과거 IRA의 활동을 지지하는 주민이 있기 때문인데, 대부분 아일랜드의 빈곤층이다. 중세시대부터 아일랜드의 농민들은 영국의 부재지주로부터 큰 수탈을 당해왔고, 산업사회가 되어서는 영국의 산업자본 밑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노동자가 되었다. 북아일랜드는 이런 문제가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뿌리 깊은 계층 간 갈등이 사라지지 않는 한 평화가 정착되기 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