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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세계의 분쟁지역(이원표)

(25호) 공존에서 증오의 대상이 된 부족 전쟁, 르완다

공존에서 증오의 대상이 된 부족 전쟁, 르완다

세계의 분쟁지역 ⑧


아프리카라는 비극

사실상 지중해권에 속해있던 북부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아프리카 대륙은 오랫동안 미지의 대륙이었다. 그러나 미지의 대륙이라는 것은 순전히 유럽인의 관점에 불과한 것이고, 아프리카에는 수많은 부족국가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15세기 유럽의 대항해시대에 많은 탐험가들이 불안한 범선을 타고 아프리카 해안선을 따라 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프리카 서부와 남부 해안선을 따라 유럽인들이 항구를 건설하게 되
는데, 향후 이곳들이 식민지 건설의 전초 기지 역할을 한다. 19세기가 되어 벨기에는 콩고를 자신의 식민지로 거두고, 1884년 베를린 회의에서는 유럽 각국이 제멋대로 아프리카 식민지화의 원칙을 합의했다. 우선 진출한 벨기에의 콩고 식민지를 인정하면서 앞으로도 실제로 통치할 능력이 입증되면 식민지로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이로써 아프리카는 유럽인들의 칼에 맡겨진 케익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고, 실제로 칼로 케익을 자르듯 잘려져 나간 것이 현재에 국경선이 되었다.
문제는 아프리카의 원주민인 부족들이 그 국경선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에 있었다. 한 부족이 여러 나라에 걸쳐 있고, 한 나라에는 여러 부족들이 살게 되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부족   간의   권력   다툼이   내전으로   이어지고,   또 그 내전에서 자신의 부족을 지원하기 위해 인근 국가가 개입하는 등 부족간 갈등이 커졌고, 제국주의 국가들은 그런 부족 간 갈등은 이용해서 아프리카의 자원을 탐하면서 아프리카라는 비극이 형성되었다.



식민지 지배가 만든 대립

르완다는 적도 바로 아래에 위치하는 아프리카 중앙의 작은 국가이다. 르완다를 비롯하여 부룬디, 콩고 일부 지역 등 아프리카 중앙에는 기원전부터 후투족과 투치족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둘 중에서도 후투족이 거의 90%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한다. 하지만 후투족은 농경민족이고, 투치족은 유목민족이어서 소를 소유하고 있는 투치족이 후투족에 비해 부유한 계층이었다. 그러나 후투족도 부자가 되어 소를 소유하게 되면 투치족으로 간주되었고, 부족 간의 결혼도 자연스럽게 이뤄져 평온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르완다를 식민지로 삼은 독일(1차 세계대전 이전)과 벨기에는 투치족의 국왕제를 지지하는 한편 투치족 우대제를 시행하여 투치족과 후투족 간의 분열을 조장했다. 그러다 투치족 사이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벨기에는 후투족 우대로 정책을 바꾸었다. 그러자 그동안 억눌려 있던 후투족은 투치족을 상대로 보복활동을 벌였고, 많은 투치족이 국외로 탈출하기에 이른다. 르완다는 비록 독립(1964)을 하게 되지만 이미 투치족과 후투족은 씻을 수 없는 앙금을 지닌 채였다.



투치족에 의한 개혁, 그러나

국외로 탈출한 투치족은 우간다의 투치족 반군과 함께 ‘르완다 애국전선(RPF)'를 결성하여 무장투쟁을 벌였다. 르완다 내에서는 후투족 국방장관인 하비야리마나가 쿠데타(1973)를 일으켜 대통령(1975)이 되어 있었다.
1990년, 투치족의 RPF는 르완다로 진격했다. 내전이 벌어지면서 RPF는 후투족을, 정부군은 투치족을 각각 대량학살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 내전은 94년에 RPF가 수도 키갈리를 점령하면서 종결되었고, 후투족 대통령은 하비야리마나는 암살되었다. 권력은 다시 투치족에게 넘어왔지만, 르완다의 민족분쟁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다음이었다.
투치족의 RPF는 새로운 정부의 대통령으로 후투족의 비지뭉구를 세우고, 신분증명서에 민족란을 삭제하는 등 공존노선을 취한다. 하지만 RPF의 실력자인 카가메가 부통령 겸 국방장관으로 모든 실권을 쥐고 있었고, 투치족에 의한 보복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갈등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르완다의 민족 분쟁은 인근 국가로 확산되는 조짐까지 보였다.



콩고 내전으로 확대

내전의 막바지에 후투족 대통령 하비야리마나가 탄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비행기 사고는 투치족 게릴라의 소행으로 지목되어 후투족에 의한 대대적인 보복이 일어났다. RPF 또한 후투족을 대량학살하면서 종결될 듯하던 내전이 다시 불이 붙었고 결국 투치족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 이 4년간의 내전으로만 약 150만명이 학살되었다.
투치족 학살에 가담했던 후투족들은 인접국가인 콩고로 도주했다.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투치족 정부의 군대가 콩고를 침략하여 콩고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콩고의 모부투 정권이 후투족을 옹호하면서 국내의 투치족계인 바냐물량게족을 탄압했고, 이 바냐물량게족이 반군을 결성(1996)한 것이다. 바냐물량게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콩고․자이르 해방민주연합(ADFL)에 르완다, 우간다, 앙고라가 지원하였고, 결국 모투부 정권이 몰락, ADFL을 이끌었던 카빌라가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카빌라는 콩고로 도주한 후투족을 토벌하기 위한 르완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고
고, 오히려 르완다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에 르완다 투치족은 다른 콩고 반군을 지원했고, 수단은 카빌라를 지원하는 등 콩고 내전은 주변 인접국들의 지원 아래 전개되었다. 그 와중에 카빌라는 암살당하였는데, 그 아들인 조셉 카빌라가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2002년이 되어서야 콩고 카빌라 대통령과 새로 취임한 르완다 카가메 대통령이 평화협정에 조인하고 내전 종결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이어 2008년에 콩고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평화안을 합의했다. 불안하지만 콩고내전도 일단락되어가는 양상인 것이다.



불안한 평화

후투족과 투치족의 대립은 르완다의 문제만은 아니다. 인근 부룬디도 르완다와 마찬가지로 후투족과 투치족이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다. 투치족 정부가 후투족을 탄압하고, 선거를 통해 당선된 후투족 대통령이 암살되는 등 양 부족 간의 대립이 심하다. 넬슨만델라의 끈질긴 평화 중재로 서로 간에 평화협정을 맺긴 했지만 불안하다.
이렇게 르완다, 콩고, 부룬디, 우간다 등 인접한 모든 국가들이 얽혀 들어가면서 부족 간 대립은 내전으로, 다시 국가 간 전쟁으로 확대되는 양상이 반복되고 있다. 비록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부족 간 대립이 잦아들고 있긴 하지만, 현재로서는 아주 불안한 평화가 아닐 수 없다.

▲ 르완다 후투족 난민행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