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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세계의 분쟁지역(이원표)

(21호) 바다를 둘러싼 투쟁, 일본의 섬 쟁탈전


바다를 둘러싼 투쟁, 일본의 섬 쟁탈전

세계의 분쟁지역 ④



두 개의 기념일

지난 달, 일본에서는 두 개의 기념일 행사가 치러졌다. 먼저 2월 22일에 우리 국민들이 크게 분노하고 있는 소위 ‘다케시마의 날’ 기념행사가 열렸다. 정부관계자와 여당 의원은 보이지 않았지만, 자민당, 국민신당 등 중․참의원 10여명이 참석했다. ‘다케시마의 날’은 1905년에 일본 정부가 독도를 다케시마로 칭하여 시마네현에 속한다고 결정한 사실을 들어 2005년에 시마네현
에서 정한 것이다. 현 일본정부는 국가기념일로 제정하는 것은 고려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 보름 전인 2월 7일은 ‘북방영토의 날’이다. 현재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북방영토에 대해 일본은 1981년부터 매년 북방영토 반환을 요구하는 전국대회를 열었고, 올해는 하토야마 총리가 직접 참석하여 “민주당 정부가 가장 이루고 싶은 성과 중에 하나가 북방영토 문제 해결”이라고 꽤 강경하게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이 외에도 일본은 오키나와와 중국 사이의 남중국해에 존재하는 센카쿠섬(중국명 댜오위다오)의 영유권에 대해서도 중국과 대립하고 있어 일본은 인근 국가와 모두 섬의 영유권을 두고 다투고 있는 모양새이다. 언뜻 보면 섬나라인 일본의 무리한 영토욕심으로도 보이고, 군국주의의 망령이 동북아시아를 괴롭히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각각의 분쟁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독도는 오랜 기간 한국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고, 일본이 주장하는 영유권의 근거가 일본의 조선침략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에 일본은 일부 극우파를 제외하면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한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다. 센카쿠섬도 독도와 같은 무인도이고, 비록 중국과 가깝지만 19세기부터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터에 최근 인근 해역에 석유매장이 확인되면서부터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우리가 독도를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것처럼 일본도 센카쿠 섬에 대해 그런 셈이다.
하지만 북방영토는 문제가 조금 복잡하다. 우선 이곳은 독도와 센카쿠 섬과는 달리 오랜 기간 사람이 거주하는 땅이고, 지금도 그렇다.



북방영토, 일본 최대의 영토 분쟁

북방영토의 문제는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792년, 러시아 사절단은 일본의 훗카이도를 방문하여 통상을 요구했는데,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도쿠가와 막부는 이를 거절하고 에토로후 섬에 경비소를 설치했다. 그 뒤 도쿠가와 막부는 미국, 영국에 이어 1855년에 러시아와 통상우호조약을 체결하고 에토로후와 우루프 섬 사이에 국경선을 확정했다. 이 조약이 북방영토 영유권에 대한 일본 측의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조약에 사할린이 언급되지 않아 주민 간 분쟁과 혼란이 일었다. 특히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남하정책을 펼치면서 사할린에서의 분쟁이 가속화되자, 1875년 일본은 사할린을 러시아에 넘겨주고, 대신 북쪽 쿠릴열도 18개 섬을 넘겨받았다. 일본으로서는 큰 손해였지만 강대국 러시아를 상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듬해 강화조약(포츠머스 조약)에서 남사할린을 차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일본은 남사할린과 쿠릴열도 전체를 자국령으로 두었다. 그러나 전
쟁이 끝나가던 1945년 8월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고 극동방면에서 진주하기 시작했다. 제1극동군은 사할린을 시작으로 북방영토까지 점령했으며, 제2극동군은 캄차카섬에서 시작하여 쿠릴열도 전체를 점령했다. 제1극동군은 훗카이도까지 진주하려했으나 미국의 반대로 북방 4도까지를 자국령으로 선언하는 것에 만족해야했다. 여기에 살고 있던 일본 주민 1만 7천여 명은 일본 본토로 강제 추방되었다.
패전국인 일본은 1951년 연합국과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국제사회에 복귀했다. 이 조약에서 일본은 사할린과 쿠릴열도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는데, 문제는 쿠릴열도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명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은 이 조약에서 쿠릴열도는 우루프와 그 북쪽의 섬이며 북방영토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소련은 북방 4도를 포함한 모든 섬이 쿠릴열도라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소련은 미국이 주도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도의 협상이 필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본래 그 땅은 누구의 소유인가

▲ 아이누족 가족의 사진 (1904)

 

일본은 북방영토를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북방영토는 훗카이도 동쪽에 있는 에토로후, 쿠나시리, 시코탄과 하보마이제도를 지칭하는데, 모두 합친 면적이 오키나와현의 두 배 정도가 된다. 이곳은 오랜 기간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인데, 이 말에는 단서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원래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아이누 족으로 지금은 일본인이지만 과거 일본은 이들을 이민족으로 취급하며 차별과 탄압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누 족은 사할린과 쿠릴열도, 그리고 훗카이도에 널리 퍼져 살았는데, 훗카이도의 아이누 족은 일본인과 많이 섞여 동화된 반면 사할린과 쿠릴열도의 아이누 족은 독특한 자신만의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훗카이도에 2만 여명만이 살고 있을 정도로 흔적이 희미해지고 있다. 러시아와 일본이 이곳을 두고 영역 싸움을 하는 동안 원주민이던 아이누 족은 삶터를 잃어버린 셈이다. 원래 아이누의 땅이었으니 마치 장물을 두고 도둑놈끼리 제 것이라 싸우는 모습이다.
아이누 족은 다른 일본인과 생김새가 확연히 구분된다. 그래서 한 때, 아이누백인설이 퍼지기도 했으며 이런 사고는 군국주의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의 근거가 되었다. 아이누 족의 모든 풍습은 미개한 것으로 취급되었고, 아이누 족의 땅은 일본 내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근대 일본의 성립 과정에서 아이누 족은 그들의 모든 전통이 금지되었고, 근대 사회 내내 철저히 억압받고 착취 받았다.
아이누 족의 기원에 대해서 많은 학설이 있지만 그들 역시 몽골로이드 계통이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른 몽골로이드 계 민족보다 고(古) 몽골로이드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오랜 기간 신체적 특징이 변해온 다른 민족과 달라 보이는 것뿐이라는 설명이다.


사실은 영토가 아닌 영해권 다툼

현재 러시아는 ‘일본의 북방영토 반환 요구’에 대해 이미 해결이 난 것이라면서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한 때, 소-일간 국교 회복을 위한 공동선언에서 소련 측이 북방 4도 중 하보마이와 시코탄 두 섬을 평화조약 후에 인도할 뜻을 밝히기도 했지만 일본 내 미군부대 주둔이 이유가 되어 반환교섭은 중단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와 일본 간의 평화조약이 다시 추진되기도 했지만 러시아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면서 그것도 힘들게 되었다. 특히 푸틴 총리는 대통령 시절부터 이 문제에 대해 단호한 입장이어서 반환 교섭이 쉽게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섬에 대한 영토분쟁이 대개 그렇지만, 북방영토 문제도 핵심은 섬이 아니라 바다에 있다. 북방영토 주변에 형성된 황금어장으로 인해 사실 북방영토 문제는 어업자원을 둘러싼 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영해침범을 이유로 러시아(소련)의 일본어선 나포 사건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고, 배타적 경제수역에 대한 러시아(소련)의 조치가 아주 강력해서 훗카이도의 어업은 굉장히 큰 타격을 받았다.
사실 바다에서의 충돌은 심심찮게 일어난다. 우리도 남북 간에 서해 NLL 근방의 충돌이 자주 일어나고 있고, 이 때문에 평화수역을 설정하자는 이야기도 있다.
바다에서 출동이 일어나는 이유는 어장과 해저자원 때문이다. 최근에는 해저자원이 크게 주목받으면서 바다에서 권리를 확보하고자 하는 각 국의 노력이 비상하다. 특히 동아시아의 바다는 특수한 역사적 환경으로 인하여 가장 분쟁이 심한 곳이다. 일본과 러시아 간의 북방영토 문제, 일본과 한국 간의 독도 문제, 일본과 중국 간의 센카쿠섬 문제, 그리고 우리 남북간의 서해 NLL 문제까지 분쟁이 끊이질 않는다. 최근에는 중국과 대만이 타이완 해협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고, 남중국해의 난사군도를 둘러싸고, 중국과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가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어 동아시아의 바다는 세계 분쟁의 새로운 화약고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