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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세계의 분쟁지역(이원표)

(19호) 21세기 첫 독립국, 동티모르


21세기 첫 독립국, 동티모르

세계의 분쟁지역 ②

이원표 (편집위원)


다른 배경, 다른 역사

티모르 섬은 인도네시아 소(小)순다열도의 가장 큰 섬이며 동쪽 끝에 위치해 있고, 오스트레일리아와도 가깝다. 티모르 섬의 원주민은 테튬족을 비롯하여 말레이계, 파푸아계 등 36개의 종족이 있는데, 강대국의 식민 정책으로 동부와 서부가 완전히 다른 문화적 배경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티모르 섬에 처음 상륙한 열강은 포르투갈로 16세기에 들어와 이곳을 향료무역의 중계지로 이용하는 한 편, 특산물인 백단목을 독점하였다. 그러나 곧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네덜란드와 분쟁을 하게 된다. 결국 두 나라는 티모르 섬을 분할하여 서반부는 네덜란드가 차지하여 자신이 지배하고 있던 인도네시아에 통합시켰고, 동반부는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인도네시아는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 점령당한 것이 계기가 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의 패망 후 승전국의 지위로 이곳을 다시 점령하려고한 네덜란드에 저항하여 1949년에 완전 독립을 쟁취했다. (인도네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립을 선포했던 1945년을 독립한 해로 기념하고 있다.) 반면 포르투갈 지배 하의 티모르 섬의 동반부는 1974년이 되어서야 포르투갈 좌파정부의 ‘해외 식민지 해방 정책’에 의해 독립의 길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350여년의 세월동안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는 완전히 다른 문화와 전통을 갖게 되었다.
인구의 90%가 무슬림이고, 세계에서 가장 큰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와는 달리 동티모르는 포르투갈의 영향으로 카톨릭 신봉자가 90%가 넘는다. 언어도 인도네시아어를 사용하는 인도네시아와는 달리 다수 부족인 테튬족의 언어와 포르투갈어를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지리적으로는 인도네시아 열도에 속해 있지만 동티모르 주민들은 강한 독립 의지를 갖고 있었고, 99년에 실시된 독립여부를 묻는 주민투표에서 인도네시아 민병대의 끈질긴 투표방해와 폭력에도 불구하고 80%가 독립에 찬성했던 것이다.


분쟁의 시작, 인도네시아의 침공

‘세계 최후의 식민지 제국’인 포르투갈은 계속된 식민지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국제사
회의 비난을 받는 한 편, 식민지 관리 비용도 점차 큰 부담이 되었다. 그러던 중 40년 넘게 지속된 국민연합당의 독재정치가 민주화를 목표로 한 소장파 장교들의 구테타로 막을 내렸고, 곧 포르투갈은 모든 식민지를 포기하게 된다.
이렇게 동티모르에서 4세기에 걸친 포르투갈의 지배가 끝났고, 포르투갈군은 모두 철수했다. 하지만 곧 세 개의 정당이 만들어지면서 서로 충돌하게 된다. 좌파인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프레틸린)’은 즉각적인 독립을 선언하여 주민들의 지지를 받지만, 이에 위협을 느낀 ‘티모르 인민민주주의연합(APODETI)'과 ’민주동맹(UDT)'는 인도네시아와의 합병 선언을 발표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인도네시아는 ‘공산국가 수립은 용인할 수 없다’며 동티모르를 침공, 1976년 이 곳을 자신의 27번째 주로 합병하였다.
합병 선언 후, 인도네시아군과 합병파 민병대는 독립파 전투 조직을 잔인하게 토벌하기 시작했고, 독립을 지지하는 주민들도 탄압했다. 1991년에는 현재 수도인 딜리에서 군에 의한 발포로 180명이 희생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독립파의 투쟁은 계속되었고, 합병파와 인도네시아군의 토벌과 탄압으로 동티모르 주민들의 삶은 계속 피폐화되어 갔다.


동티모르 학살, 미국은 몰랐을까

오스트레일리아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국가가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제 합병을 비난했고, UN에서는 인도네시아 비난결의가 8번이나 채택되었다. 그런데 명실상부 세계의 경찰국가를 자임하는 미국은 동티모르 학살을 모르고 있었을까. 1991년 독립파 청년 고메스의 죽음을 기리기 위한 시위에 군대가 발포하여 그 자리에서만 180명이 죽고 이 후 이 사건에 대한 체포, 감금, 고문 등으로 273명이 사망하고, 255명이 실종되었다. 인도네시아의 지배기간 동안 약 20만 명이 학살되었다고도 하고, 전체 주민의 1/3이 죽었다고도 한다. 이 모든 사건에 대해 미국이 침묵한 이유는 단 하나, ‘반공’이었다. 좌파인 프레틸린당이 독립국가를 만들게 되면 베트남에 이어 또 다른 공산국가가 동남아에 들어설 것을 우려하여 인도네시아의 침공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미국 국내법에는 침략행위를 한 국가에 군사무기 수출을 금지하도록 되어 있지만 인도네시아에 대한 무기 수출은 계속되었고, 동티모르를 침공한 인도네시아군의 90%가 미국제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또, 최근 공개된 당시 포드 미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 그리고 수하르토 인니대통령의 대화록에 미국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에 대해 사전에 통고받았고, 이를 묵인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있어 파장을 일으켰다. 이 대화에서 수하르토는 “동티모르 독립운동에 대해 특단의 조치를 취할 것”라고 밝혔고, 포드는 “양해할 것이며, 이 문제에 대해 압력을 넣지 않을 것”이라 답했다.


21세기 첫 독립국가 탄생

동티모르 독립운동은 1996년 동티모르의 정신적 지도자 카를로스 벨로 주교와 망명중인 운동가 호세 라모스 오르타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된다. 인도네시아도 32년간 군림해온 수하르토 대통령이 사임하고 그의 후임으로 하비비가 대통령이 되자 동티모르에 자치권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공산화를 경계했던 미국도 냉전이 해소되자 민족자결로 돌아섰고, 오스트레일리아도 입장을 바꿨다. 애초에 동티모르가 자원이 많지도, 산업이 발달한 지역도 아니었기 때문에 지리적 이점이 사라지자마자 모두 관심을 거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도 외화 원조가 절실했기 때문에 동티모르 독립을 승인하여 국제적 이미지를 제고하고자 했다.
1999년, 자치주와 독립을 선택하는 주민투표가 시행되었고, 전체 주민의 80%의 압도적인 지지로 독립이 선택되었다. 이 과정에서 합병파 민병대의 잔혹한 협박과 폭력이 있었지만, 독립을 갈망하는 동티모르 주민들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곧 인니 의회는 동티모르 합병을 철회했고, 유엔은 선거와 치안 등을 위한 과도행정기구를 설치하였다.
2002년 4월 14일,   동티모르는 독립영웅 사나나 구스마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면서 독립을 선포했다. 21세기 들어 첫 독립국가인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오래된 군사적 침략과 내전으로 상처를 입은 동티모르의 아픔은 여전히 치유 중에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볼 문제, ‘평화’유지군(PKO)라는 환상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전후하여 합병파 민병대의 만행이 지속되었고, 이를 방지하고, 공정한 선거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유엔 평화유지군(PKO)이 파병되었다. 한국도 파병에 동참하였고, 일본 자위대도 파병군에 합류하여 많은 논란이 일었다.
그런데 과연 평화유지군은 ‘평화’에 도움이 될까. 몇몇 이해당사국들로 구성되는 다국적군 등에 비해 우리는 UN이 관리하는 평화유지군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경향이 있다. 이라크나 아프간 파병에 대해서는 반전운동이 불 같이 일어나지만 평화유지군 활동에 대해서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과연 평화유지군은 뭔가 다른 것일까.
1948년 팔레스타인에 처음 파병된 이후로 평화유지군은 점점 덩치를 키우고 있다. 냉전 종식 이후 소규모 지역/민족 분쟁이 많아져 특정국가가 아닌 UN이 직접 분쟁을 조절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라고 평화유지군의 의미를 설명하지만, 누구도 UN을 공정한 국가 간의 분쟁 조정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마당에 평화유지군이 공평무사하게 해당 지역의 분쟁을 조정할 것이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게다가 군대의 투입은 결국 분쟁의 불씨를 키우는 결과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일례로 1999년 세르비아 민병대로부터 코소보 주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평화유지군이 파병되었지만 정작 대량학살은 평화유지군 파병 이후에 발생했다. UN의 군대가 세르비아를 공습하여 오히려 대량 보복 참극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또, 평화유지군이 파병되는 기준을 보면 대개 강대국들의 이해가 얽혀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동티모르에 파병된 평화유지군이 합병파 민병대의 학살을 중단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거의 유일한 사례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평화유지군을 주도했던 오스트레일리아가 동티모르 정치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과 동티모르와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의 해역에 대한 유전개발권이라는 선물을 챙겼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영향력에 대항했던 알카티리 총리는 결국 사퇴를 해야 했다.
결국 평화유지군이란 강대국들의 이해를 담고 있는 그럴듯한 도구에 불과하다.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점령을 끝까지 용인한 오스트레일리아가 동티모르 평화유지군에 가장 많은 1500명을 파견한 것이 이것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평화유지군이 ‘평화’라도 유지시키는가 하면 그 조차도 물음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