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재

(40호) ⑭ 무소불위의 숙종시대 무소불위의 숙종시대 왕비를 바꾸자는 게 역모? 남인 집권기로 시작하여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였다가 다시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는 동안 수백명의 사대부들이 죽거나 다쳤다. 서인의 거두 송시열도 이 와중에 죽었고, 윤휴, 허목 등 남인의 기둥도 쓰러졌다. 보통 조선을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라고 부르지만 숙종만은 양당의 갈등을 이용하여 강력한 절대왕권을 휘둘렀다. 당시 집권 남인이나 야당인 서인 모두 임금의 눈치를 보느냐 여념이 없었고, 어떻게든 임금의 마음을 돌려 권력에 다가서는 데에만 힘썼다. 집권이 정의인 시대이고 실권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제로섬 정치에서 유일한 주권자인 임금만이 모든 것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반정을 통해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예에서처럼 이전의 사대부들은 언제든 왕조차도 .. 더보기
(39호) ⑬ 남인의 마지막 반격과 장희빈 남인의 마지막 반격과 장희빈 서인의 분열 경신환국으로 권력에서 쫓겨난 남인은 역모에 몰려 부당한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서인 중에서 상식적인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무고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 사태에 대해 젊은 서인들이 분노했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숙종은 서인의 원로대신을 불러들였다. 그렇게 지목된 이들이 송시열과 박세채, 윤증이었다. 송시열은 출사하자마자 무고사건을 덮어버려 젊은 서인들의 기대를 저버렸고, 박세채는 출사는 했지만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그리고 윤증은 과천에 머물면서 서울로 올라오지 않으면서 관망하고 있었다. 이에 박세채가 윤증을 찾아가 출사하여 함께 바로잡을 것을 요청했는데, 여기서 윤증은 세 가지 조건을 들었다. 첫째는 ‘남인과 화평할 수 있겠는가’, 둘째는 ‘.. 더보기
(38호) ⑫ 파란만장한 숙종시대의 개막 파란만장한 숙종시대의 개막 조선에서 가장 정치적인 왕 기나긴 예송논쟁의 끝에서 남인의 손을 들어주었던 현종, 재위 15년동안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는 것이 자의대비의 복제를 3년(효종상)과 1년(효종비상)으로 정한 것이었다. 업적이라고 하기엔 좀 허무하지만 그것을 통해 왕실과 남인이 왕권을 다지는 기초를 만들었으니 마냥 무시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종은 기나긴 예송논쟁을 마치고 남인과 함께 뭐 좀 해볼 만 할 때, 느닷없이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만 13세의 어린 세자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숙종이다. 임금의 묘지문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가 쓰는 것이 관례였고, 당시에 그렇게 지목되는 이가 바로 송시열이었다. 아직 남인 정권이 탄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남인 유생 곽세건이 예송논쟁을 .. 더보기
(37호) ⑪ 제로섬 정치의 시작 제로섬 정치의 시작 율우의 문묘종사 문묘는 공자를 받드는 사당으로 문묘종사라는 것은 공자에게 제사를 지낼 때 함께 배향하는 것을 말한다. 문묘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해서 그의 학통을 잇는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사성을 배향하고, 그 뒤에 공자의 수제자인 공문십철과 송조(宋朝) 육현(주자 등)이 좌우로 배향된다. 따라서 유교 특히 주자학의 나라인 조선에서 공자에서 주자까지 이어지는 문묘에 함께 종사된다는 것은 그의 학문과 사상이 조선의 국시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을 처음 정치적으로 활용한 것이 사림파인데 조광조는 사림파의 지주인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종사를 주장하여 자신들의 이념적인 우위를 확실히 하고자 했다. 사림파는 정몽주로부터 시작하여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 등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가지.. 더보기
(35호) ⑩ 대동법, 기나긴 투쟁의 승리 대동법, 기나긴 투쟁의 승리 조선의 세법 중국 수․당 시대에 확립된 조용조(租庸調)는 국내에 영향을 미쳐 고려시대 이후로 우리나라의 중요한 세법이었다. 조(租)는 토지에, 용(庸)은 사람에게, 조(調)는 가호에 부과되는 것인데, 조선시대에는 각각 전세, 군역(또는 신역), 공납이라는 이름으로 부과되었다. 전세는 토지에 대한 조세로 조선 초에는 토지의 상태에 따라 차등부과되었지만, 1결당 4두로 일원화되어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군역과 공납이었다. 특히 호별로 부과되는 공납은 그 폐단이 심각하여 공납 때문에 유랑하거나 노비가 되는 백성들이 많아 큰 사회문제가 되어 있었다. 공납이란 원래 지역의 특산물을 임금에게 바치는 것으로 백성들의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생긴 것이다. 그러던 .. 더보기
(34호) ⑨ 병자호란, 국난을 자초하다 [연재] 조선의 당 ⑨ 병자호란, 국난을 자초하다 이원표 (편집위원) 광해군의 실리외교, 그러나 북방민족의 하나인 여진족은 한 때, 송나라(한족)를 압박하여 중원을 노릴 정도로 강성했었지만, 몽골족의 등장으로 패망하여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러다 명나라 말기인 1616년에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정하고 명나라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광해군 재위 9년째 되는 해로 한창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러다 2년 뒤인 1618년(광해군 11년), 명나라(한족)와 후금(여진족)은 요동에서 격돌하게 된다. 명나라는 조선에 원군을 청하는데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바쁜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명나라의 요구에 소극적이었다. 또, 당시 명과 후금의 기세.. 더보기
(33호) ⑧ 서인의 조선 명목뿐인 연립정부 “갑자기 광해군이 폐출되고 새 임금이 세웠다는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새 임금이 성덕이 있는 줄 알지 못했으므로 상하가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중략) 위세로써 진압할 수도 없어서 말하기 지극히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오리 이원익이 전 왕조 때의 원로로서 영상에 제수되어 여주로부터 입조하자 백성들의 마음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인조반정의 핵심인물이었던 이서(李曙)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쿠데타로 임금을 바꾸었지만 민심은 이를 쉽게 수긍하지 못하고 있었다. “위세로써 진압할 수도 없어서”라고 했을 정도로 민심의 이반을 겪고 있던 것이다. 자칫 새로운 난에 휩싸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서인은 남인의 원로,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전격 추대한다. 폐모론에 반대하여 여주에서 유배생활을.. 더보기
(32호) ⑦ 쿠데타로 끝난 광해군의 정치 조선의 당 ⑦ 쿠데타로 끝난 광해군의 정치 서러운 서자는 피를 토하고 서자도 아닌 서손으로, 그것도 셋째로 태어나 왕이 된 임금, 선조. 역사가들은 항상 그를 설명할 때, 방계 콤플렉스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서열로는 한참 멀어있던 그가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을 갖춰 여러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방계 콤플렉스’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것은 바로 광해군에 대한 그의 처사 때문이다. 선조가 광해군의 지위를 끊임없이 흔들었던 것이 서자여서 인지, 아니면 부자간도 나눌 수 없는 권력의 속성 때문인지는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국난의 시기에 세자로서 위기를 극복한 광해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선조는 ‘방계 콤플렉.. 더보기
(31호) ⑥ 나라를 구한 세자, 광해군 나라를 구한 세자, 광해군 묘호가 없는 임금 임금의 호칭에는 두 가지가 있다. 연호와 묘호이다. 연호는 햇수를 세는 기준이지만 보통은 임금의 즉위와 함께 연호를 새로 제정하기 때문에 연호를 임금의 호칭으로 쓴다. 하지만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한 터라 독자적으로 연호를 쓰진 않았다. 훗날 고종이 스스로 독립국임을 내세워 황제 칭호를 사용했을 때 비로소 연호를 가졌다. 따라서 고종황제는 사용한 연호를 따서 광무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임금이 죽고 난 뒤에 그의 공적을 기려 묘호를 만들어 부르는데, 조선에는 죽고 나서 이 묘호를 받지 못한 임금이 세 명이 있었다. 가장 먼저 세조에 의해 폐위된 단종은 왕위에 쫓겨나 노산군으로 강등된 뒤 살해되었는데, 숙종 때가 되서야 단종이라는 묘호를 받고 복위되었.. 더보기
(30호) ⑤ 냉혹한 정치의 세계 냉혹한 정치의 세계 시인 정철과 정치인 독철(毒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관동 팔백리의 방면을 맡기시니 서인의 행동대장 정철이 1580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쓴 「관동별곡」은 한국 가사 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이 외에도 「장진주사」,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국어시간의 송강 정철은 그야말로 한국의 중세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역사시간에 만난 정철은 180도 변해있다. 「관동별곡」에서 정철은 ‘상계(上界)의 진선(眞仙)’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신선놀음을 하기에 정철은 너무 피가 뜨거운 인물이었다. 일례로 아직 사림이 집권하기 전인 명종 때 사헌부 지평이었던 정철은 임금의 사촌형인 경양군을 사형시킨 일이 있었다. 경양군이 재산을 노리고 처조카를 살해한 사건이었는데,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