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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조선의 당(이원표)

(30호) ⑤ 냉혹한 정치의 세계

냉혹한 정치의 세계

 

시인 정철과 정치인 독철(毒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관동 팔백리의 방면을 맡기시니

서인의 행동대장 정철이 1580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쓴 「관동별곡」은 한국 가사 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이 외에도 「장진주사」,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국어시간의 송강 정철은 그야말로 한국의 중세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역사시간에 만난 정철은 180도 변해있다.

「관동별곡」에서 정철은 ‘상계(上界)의 진선(眞仙)’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신선놀음을 하기에 정철은 너무 피가 뜨거운 인물이었다. 일례로 아직 사림이 집권하기 전인 명종 때 사헌부 지평이었던 정철은 임금의 사촌형인 경양군을 사형시킨 일이 있었다. 경양군이 재산을 노리고 처조카를 살해한 사건이었는데, 정철은 임금의 특별한 부탁을 거절하고 사형을 집행한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오랫동안 출세길이 막혔다가 사림이 집권한 이후에야 다시 중앙 정계로 진출할 수 있었다. 사림 집권 이후에는 서인에 가담했는데, 이이에 대한 동인들의 부당한 탄핵을 온 몸으로 맞선 사람 중에 하나였다. 정철보다 두 배정도 성격이 격한 조헌이 앞뒤 안 가리고 몸을 던진 서인의 돌격대장이라면, 정철은 냉정하게 서인을 다시 집권당의 위치에 올린 인물이었다. 유배지를 전전하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되어 전사한 조헌은 정철에 대해 같은 서인이면서도 왕실의 외척이라는 이유로 멀리했었지만 정철을 만나보고 자기와 같은 과라는 것을 알고는 둘도 없는 절친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이이가 죽고 나서 임금의 마음이 서인을 떠났지만, 정여립 사건을 계기로 위관이었던 정철은 철저히 동인을 탄핵했고, 기어이 서인을 다시 집권의 위치에 올렸다. 이렇게 이이가 없는 서인은 성혼과 정철을 중심으로 정국을 헤쳐가고 있었다. 훗날 선조가 서인을 몰락시키면서 성혼과 정철을 ‘간혼(奸渾), 독철(毒撤)’이라고 비난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시를 썼던 정철은 정치의 세계에서 누구보다 냉혹했다.

하지만 정철이 여러 시에서 허무와 회한을 표현했던 것을 보면 현실에서 독하게 정적들을 숙청하는 데 앞장섰지만, 마음속으로는 현실 세계를 떠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말년에 가서는 더 이상 싸울 기력을 잃고 강화로 이주했는데, 끼니를 친구에게 부탁해야할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권력 다툼의 선두에서 누구보다 맹렬히 싸웠지만 분명 그 자신의 영화를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세자 건저와 서인의 실각

1589년, 정여립 사건에서 정철의 활약으로 인해 서인은 다시 집권당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동인의 중량급 인사인 이산해가 영의정으로 버티고 있었고, 전국 1등 유성룡이 우의정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철이 좌의정으로 있고, 대사헌, 부제학 등 서인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불안한 집권이었다. 그러던 중 동인의 영수였던 이산해가 정철의 곧은 성격을 이용한 계략을 세웠다. 바로 세자 건저 문제였다.

1591년, 선조의 나이가 40이 되었지만 아직 세자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방계 혈통으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선조는 적자를 후계자로 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왕비에게 자식이 없었다. 사실 선조는 그냥 방계라고 말하는 것도 부족하다. 그는 중종의 여섯 후궁 중의 하나인 창빈 안씨의 손자였다. 서자도 아니고 서손인 것이다. 게다가 장남도 아니고 중종의 서자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다. 왕은 커녕 왕가로서 대접받기에도 좀 멀리 떨어져 있는 입장이었지만 자식이 없던 명종의 총애를 받았고, 그 역시 뛰어난 유학자로서 사대부들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래서 선조는 적자를 기다렸는데, 더 이상 세자의 자리를 비워둘 수 없다는 것은 그도 알고 신하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히 세자 건저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당시 거론될 수 있는 왕자로는 일찍 죽은 공빈의 소생이자 서장자인 임해군과 둘째 광해군이 있었고, 인빈의 소생인 신성군이 있었다. 하지만 장자인 임해군은 많이 삐뚤어져 있어서 신하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고, 모범생 스타일인 광해군에게 모든 신하들의 마음이 가 있었다. 그리하여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 우의정 유성룡, 서인인 좌의정 정철, 대사헌 이해수 등 동서 각 당의 중진들은 회동을 갖고 광해군을 추천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산해는 선조의 마음이 신성군에게 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계략을 세웠다. 함께 세자 건저를 주청하기로 한 날 전에 인빈 김씨의 아우 김공량을 찾아가 ‘좌의정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운 후 신성군 모자와 외가를 모두 죽일 것’이라고 일렀다. 깜짝 놀란 김공량이 인빈에게 말하고, 인빈은 선조에게 ‘정철이 광해군을 세우고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선조는 ‘정철이 그럴리 있냐’며 달래기만 했다.

세자 건저를 주청하기로 한 날 이산해는 조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동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인 이산해가 자리에 없자 우의정 유성룡은 정철의 눈치를 살폈고, 성격이 급한 정철은 좌의정으로서 세자 건저를 주청했다. 누가 좋겠냐는 선조의 물음에 정철은 양 당이 합의한 대로 광해군을 추천했다. 선조는 정철이 광해군을 추천하자 바로 인빈의 참소가 생각났고, 인빈의 말이 맞다고 여겼다. 분노한 선조는 “내 나이 아직 마흔도 안 되었는데 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라며 호통을 쳤다. 왕조에서 후계자의 문제는 자칫 역모로 이어질 수도 있는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예상 밖의 반응에 정철은 식은땀이 흘렀다. 사실 임금의 나이 마흔이면 세자가 없는 게 문제지 세자 건저를 이야기한 게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고 세 왕자 중에 신성군은 너무 어리고, 임해군은 누가 보아도 많이 삐뚤어져 있었기 때문에 광해군을 추천한 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조선은 왕조 국가였고, 세자는 다음에 왕이 될 사람이다. 일부 신하들이 추진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정철은 유성룡을 쳐다보았는데, 머리가 좋은 유성룡은 이산해가 나오지 않고, 선조의 반응이 이상하자 이산해의 계략임을 간파하고 침묵했다. 사실 유성룡도 이산해와 같은 당이긴 했지만, 그다지 좋은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칫 자신도 말려들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침묵을 지킨 것이다. 그러자 정철과 서인이 독자적으로 세자 건저를 추진하는 모양이 되어버렸다. 여기서 적당히 물러나면 좋을 것을 정철의 성격이 그러지 못했다. 한 번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미 광해군을 세우자고 했는데, 임금이 노했다고 신성군으로 바꿀 수도 없었다. 강직한 정철은 계속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했고, 대사헌 등 서인의 중신들도 가세했다.

세자 건저 문제가 서인과 임금 간의 갈등 양상으로 전개되자 동인은 이틈에 서인을 끌어내리기에 분주했다. 결국 정철은 이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유배길에 올랐다. 그리고 정철의 실각으로 다시 정국은 동인의 손으로 넘어왔다.

 

실리주의자 이산해와 광해군

정여립 사건으로 잠시 밀려났던 동인은 이산해의 계략으로 다시 집권했다. 동인은 집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정철을 비롯한 서인 세력을 철저히 몰아세우는데 그 과정에서 의견차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산해는 사헌부와 사간원이 합계하여 정철을 탄핵하라 지시하였는데, 유성룡과 우성전이 반대한 것이다. 그러자 대사헌 홍여순이 오히려 우성전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이렇게 정철을 탄핵하면서 동인은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갈리었다. 북인은 이산해를 중심으로 유영경, 기자헌, 박승종, 유몽인, 박홍구, 홍여순, 임국로, 이이첨, 정인홍 등 주로 남명 조식의 문하였고, 남인은 유성룡을 중심으로 이원익, 이덕형, 이수광, 윤승훈, 이광정, 한백겸 등 퇴계 이황의 문하가 많았다.

북인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한 조식은 이황과 이이가 사단칠정 논의를 하고 있을 때, 이를 공리공담으로 치부하고 실천에 힘썼던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식의 학통을 잇는 북인들은 현실적인 경향이 아주 강했다.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정철을 강력히 처벌하여 서인을 몰락시켰으면서도 전쟁이 나자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여 적극적으로 대응을 했을 정도였다. 또, 전쟁 내내 주전론을 피면서 유성룡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이 화친을 주장한다고 탄핵했고, 실제로 전쟁 중 가장 많은 의병장을 배출한 것도 북인이었다.

광해군 역시 실리를 앞세운 현실적인 군주였다. 세자 건저 문제로 목숨이 왔다 갔다 했으면서도 세자 건저를 반대했던 북인과 적극적으로 손을 잡은 것이다. 광해군은 전쟁이 나지 않았다면 세자가 되기 힘들었을 위치였기 때문에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전공이 필요했다. 그래서 전쟁에 가장 적극적인 북인과 손을 잡고 분조(국왕과 세자가 조정을 나누어 국난에 대처하는 것)를 이끌어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국왕에 올라서도 북인과 함께 조정을 이끌었다.

하지만 너무도 현실적인 북인이었기 때문에 권력을 두고 끊임없이 내부에서 반목을 거듭했다. 선조가 말년에 그렇게 바라는 적자 영창대군을 보았는데, 북인 내부에서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세력이 생긴 것이다. 그리하여 북인은 정인홍을 중심으로 대북, 유영경을 중심으로 소북으로 나뉘고, 대북과 소북은 각각 광해군과 영창대군을 지지했다. 그리고 후에 광해군 시대에는 영창대군의 사사와 인목대비(선조비)의 폐모를 두고 대북은 골북과 육북, 중북으로 나뉘고, 소북은 청소북과 탁소북으로 갈려 끊임없이 갈등을 반복했다.

북인을 이끌었던 이산해와 광해군은 둘 다 실리주의자라는 점에서 뜻이 잘 통하는 파트너였다. 그래서 북인-대북 정권으로 이어지는 광해군 시대에 많은 혁신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대의와 명분을 등한시하면서 정적에 대한 강경한 숙청으로 일관한 대북정권과 광해군은 대의명분을 들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의 연합 쿠데타(인조반정)에 의해 사라지는 운명을 맞아야했다.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정부였던 북인-대북 정권과 광해군 시대는 아깝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