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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조선의 당(이원표)

(29호) ④ 이이와 집권당 서인


이이와 집권당 서인

 

이이의 분노

사림이 동/서로 분당되자, 이이는 이준경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 이준경이 이이의 주변에 사람이 넘치는 것을 보고 분당의 조짐을 읽은 것인데, 이이는 “죽기 전에 그 말이 너무 악하다”며 크게 화를 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실제로 분당이 되자 이이는 자신의 짧은 생각을 반성하고, 다시 사림을 합치기 위해 노력했다.

제일 먼저, 분당의 시발점이 된 심의겸과 김효원을 외직으로 보내고 동/서 각 당의 주요 인사들을 만나 화해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동인의 입장에서 이이는 받아들이기 힘든 인물이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동인의 지주역할을 한 이황의 이념(주리론)을 이이가 정면으로 반박(주기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동인과 이이는 정치적 신념에 큰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동인의 스승들은 모두 낙향하여 현실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던 인물들이고, 그에 반해 이이를 쫒아 현실정치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아 사림을 집권의 위치에 올려놓은 서인들은 이미 큰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현직 정치인 중에서 이이를 능가할 만한 유학자가 동인에게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인의 입장에서 이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온갖 사화를 견뎌내며 일궈온 스승들의 정치 이념을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이도 사림의 ‘대통합론’을 들어 회유를 권유했지만, 동인의 정치이념은 조금이라도 수용할 생각이 없었다. 이이 스스로는 당인이 아니었지만, 사실상 당인과도 같은 행보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대의 대유학자로서 이이만한 인물이 동/서 양측 어디에도 없었다. 특히 이이를 서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동인은 이이를 꺾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이 있었고, 동인의 젊은 정치인들은 이이를 탄핵하기 위해 불나방처럼 뛰어들었다.

이이가 김효원(동인)을 함경도 경흥부사로, 심의겸(서인)을 경기도 개성유수로 내보내자 동인은 즉각 김효원이 심의겸보다 멀리 내쳐진다며 반발했다. 사림의 재결합에 뜻을 두고 있었던 이이는 김효원의 외직을 변경하는 한편, 얼마 뒤에는 동인 정인홍의 말을 들어 심의겸을 탄핵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이이에 대한 동인의 탄핵은 그치질 않았다. 이이가 심의겸을 탄핵했을 때, 같은 서인이던 정철이 심의겸을 옹호하다가 함께 탄핵당할 위기에 처해진 것을 보고 이이가 “정철은 심의겸과 친하지만 뜻은 같지 않다”며 두둔했었다. 그러자 이제 그 일을 두고 동인 윤승훈이 찾아와 “뜻이 같은 사람끼리 친해지기 마련”이라며 이이를 궤변론자로 몰아붙였다.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자 이이도 인내심을 잃었다. 왜냐하면 당시 윤승훈은 이이에게 직접 따지고 들 만한 인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이는 “세상이 승훈과 나를 맞상대로 본다”며 탄식했고, 선조는 젊은 관료가 별 잘못도 없는 대유학자를 공격하는 것이 괘씸해서 윤승훈을 파직했다. 사림을 화합하기 위해 심의겸을 탄핵까지 했지만 그 결과로 동인들의 공격을 더 받게 된 이이는 끝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자연히 서인과 정치를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이이에 대한 동인의 공격은 계속되었지만, 이이를 대유학자로서 존경했던 선조는 거꾸로 탄핵에 가담한 동인들을 물리쳤다. 동인이었던 좌의정 김귀영과 우의정 정지연이 선조에 의해 파직되었고, 또 허봉, 송응개, 박근원 등의 동인 인사들이 계속 이이를 탄핵하다가 선조에 의해 파직당했다.

  

현실정치가 이이의 생각

이(理)를 중시하는 성리학의 기본 이념에서 벗어나 이(理)와 기(氣)가 통일되어 있다(理氣一元論)는 주기론을 폈던 이이는 왜 자신과 생각이 다른 동인과 다시 합쳐야한다고 생각했을까. 이이가 보았을 때, 조선은 창업기와 수성기를 지나 이제 경장기로 가야할 때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합리한 제도를 혁신하고 공세적으로 조선의 정치를 바꿔야 했다. 훈구세력이 몰락한 지금이 그 적기인데, 이 때 사림이 분열되었으니 이이로서는 아까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유능하고 젊은 동인들이 자신의 뜻에 따라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이이와 서인은 사림의 집권에 큰 역할을 했지만, 오래된 물은 탁해지기 마련이어서 오랫동안 관직에 있던 서인은 과거 훈구파와 비슷한 모양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위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윤두수의 뇌물사건 등 선비로서 있을 수 없는 비리사건들이 계속 터져 나오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토지였다. 원래 조선의 토지제도는 과전법으로 관리에게 토지의 수조권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즉, 토지를 직접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조세만을 걷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 나눠줄 수 있는 토지가 부족해지자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부여하는 직전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농업생산력의 발달로 인해서 농민층이 성장하면서 수조권을 지닌 관리와 토지소유자간의 대립이 생겼고, 점차 수조권으로 토지를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성종 때, 국가가 직접 조세를 거둬 나눠주는 관수관급제로 변경되었다가 아예 그냥 녹봉을 지급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사대부들이 정치와 학문에만 힘을 쓸 수 있었던 것은 토지를 지배하고 있었던 경제적인 배경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점차 토지에 대한 권한이 사라지자 직접 토지를 소유하는 수밖에 없었고, 국가가 분배하는 방식이 아닌 개인이 토지를 소유하는 방식으로 토지에 대한 지배가 이뤄지자 필연적으로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발생했다. 그러면서 토지에서 배제되는 사대부들이 늘어났고, 이들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관직에 진출하는 것뿐이었다. 젊은 동인들이 대거 출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이는 이런 배경에서 충분히 젊은 동인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토지로 인한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민 경제를 지원하기 위한 ‘경제사(經濟司)’의 설치, 그리고 공납을 쌀로 대신 받는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의 실시 등을 추진했다. 이이의 이런 현실 인식에 선조는 크게 감명받았고, “나도 이이의 당에 들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이이를 존경했다.

이이의 대공수미법은 실제로 동인이었던 유성룡, 이원익 등이 크게 지지하였고, 이들도 동인집권기에 이를 추진하려다 번번히 좌절되었다. 특히 이원익은 남인으로 분리된 후에 끝까지 대동법이라는 이름으로 이 제도를 추진하였다. 이원익의 노력으로 결국 인조 때부터 일부지역부터 시작하여 숙종 때가 되어서는 전국적으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이이의 대공수미법은 당시 기득세력이었던 서인에게 발목이 잡혀 좌절되었다. 그 후에도 서인은 대공수미법-대동법의 시행을 끝까지 방해하여 인조 때부터 완전히 시행되는 데 50년이 넘는 시간이 걸리게 만들었다.

이이의 입장에서 보면 현실을 함께 개혁할 역량이 있는 젊은 동인정치인들은 끝내 주리론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은 정작 자신의 개혁을 방해하고 있으니 엄청 답답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순적인 상황을 어찌하지 못하고 이이는 선조 17년에 세상을 떠난다. 그는 동인과 함께 현실을 개혁하고 싶어 했지만 이념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고, 할 수 없이 발목을 잡혀가면서 서인과 함께 정치를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지만 어쩌면 당연하게 이이의 개혁정치는 서인의 탄압 아래 동인, 후에 남인으로 갈라지는 이들에 의해 실학으로 다시 나타났다.

 

당쟁의 격화

조정자였던 이이가 죽자 당쟁은 불이 붙었다. 이이에 대한 선조의 신뢰도 그가 죽자 점차 시들어져 갔고, 연일 이어지는 탄핵에 임금의 마음이 움직여 결국 서인은 실각하게 된다. 사헌부를 장악한 동인은 선조의 방관 아래 서인의 유력정치인인 성혼, 박순, 정철, 윤두수 등을 연일 탄핵하여 물러나게 했다. 이렇게 동인이 집권하자 이번에는 조헌과 이귀가 서인 돌격대를 자청하여 스승인 이이와 성혼을 변호하고 나섰다. 조헌은 후에 의병대장이 되어 금산 칠백의총의 주인공이 된 인물이다. 하지만 이미 선조의 마음은 동인으로 기울었고, 과거 이이를 탄핵하다 동인이 유배를 간 것처럼 이번에는 조헌과 이귀가 유배를 가야했다.

그러던 중 정여립의 반란이 발각되었다. 정여립은 원래 서인이었다가 동인으로 당을 옮긴 인물로 이를테면 최초의 ‘철새’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인집권기에도 선조의 신임을 얻지 못해 낙향해 있었는데, 고향에서 대동계를 조직하여 반란을 도모했다는 것이 당시 정여립 사건의 주 내용이었다. 이 정여립 사건으로 동인이 크게 위축되었고, 정여립과 관련된 많은 동인 인사들이 죽어나갔다.

하지만 정여립 사건은 좀 확대된 측면이 있었다. 그의 대동계가 비밀조직도 아니었고, 오히려 지방관이 왜구 격퇴를 위해 정여립에게 대동계를 움직여줄 것을 부탁할 정도였다. 이를테면 지방 자치조직이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반란까지 몰고 간 것이다. 물론 정여립의 행보에 수상한 점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다수의 동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좀 지나쳤다. 특히 동인 영수였던 영의정 이발의 죽음은 동/서 양당을 결정적으로 갈라놓았다. 그리고 배후라 지목된 정철과 성혼은 동인의 원수가 되고 말았다.

동인들은 내심 정여립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 믿고 있었다. 따라서 동인은 적당히 처리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왕조 국가에서 반란은 그것이 아무리 작은 불씨라도 중화상을 입게 마련이다. 특히 의심 많은 임금 선조는 동인의 이런 봐주기 수사에 분노했고, 수사관을 정철로 교체하고 성혼을 이조참판으로 등용하여 서인을 대거 불러들였다.

이렇게 서인은 손에 피를 묻히고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것은 앞으로 피를 부르는 당쟁의 시작이었다. 이제 정국이 바뀔 때마다 피바람이 부는 격한 당쟁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