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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조선의 당(이원표)

(27호) ② 당쟁전야

당쟁전야

 

공신들의 나라

조선은 태조 이성계로 대표되는 신흥무인집단과 사대부들이 손을 잡아 건국한 나라이다. 이성계는 즉위교서에서 “문무 양과는 한쪽에 의해 다른 쪽을 폐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무신을 경시하는 풍조를 고치려 했지만 조선의 주류는 역시 문신, 즉 사대부들이었다. 사실 조선건국의 제일 큰 공이 있는 태종 이방원도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학식이 있던 유학자였다.

하지만 조선을 그냥 사대부의 나라라고 칭할 수는 없다. 고려 말, 사대부들은 정도전 등 역성혁명을 주장하는 급진파와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는 온건파로 갈리었는데, 후자를 대표하던 정몽주가 죽고 나서 온건파 사대부들은 모두 재야로 사라졌다. 그리하여 급진파들이 조선을 세운 셈인데, 문제는 이들이 급격하게 부패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조선초기의 여러 정변을 계기로 공신에 이름을 올려 귀족화되었다. 조선의 개국공신이 52명, 제1차 왕자의 난으로 공신이 된 자가 29명이고, 제2차 왕자의 난으로 공신이 된 자가 46명, 그리고 세조(수양대군)의 왕위찬탈로 43명이 공신이 되었다. 이 중 최고는 중종반정인데, 공신이 모두 117명에 달해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이렇게 중종 때까지 8차례의 공신책정은 이들에게 지급할 국유지 등으로 국가재정에 위기가 올 정도로 심각해졌다. 관리에게 주는 토지는 세습되지 않지만, 공신전은 세습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신의 자제들은 음서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으니 공신집단은 권력과 부를 합법적으로 세습하는 귀족이 된 셈이다. 게다가 이때쯤 되면 공신이 되는 게 그냥 권력가와 좀 친하면 ‘아무나’ 되는 수준이었다. 임금인 중종까지도 사가에 있을 때 자신의 식객으로 있던 윤탕로를 반정에 아무런 연관이 없음에도 공신에 이름을 올리자고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들 공신들은 서로간의 강력한 커넥션으로 귀족집단화 되어갔고, 필연적으로 썩어 들어갔다. 간간이 재야에 있던 선비들이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하지만 번번이 공신집단들에게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몽주, 길재 등 고려말의 온건파 사대부로부터 학맥을 잇는 이 재야선비들은 결국 지방에서 후학에만 힘을 쓸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을 사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림의 쓴소리가 임금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철저히 봉쇄하고 있던 공신집단, 이들이 바로 훈구파로 조선 전기의 집권세력이다.

 

 

만년야당, 사림

조선 건국에 반대했던 사대부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스스로 학문에 정진하는 한편, 중소지주라는 경제적 지위를 이용하여 향촌사회를 장악해갔다. 또한, 후학에 힘쓰면서 다수의 인재풀을 형성하여 자신들만의 독특한 세력을 형성했다. 훈구파가 권력세습으로 그들만의 부패한 귀족화를 꾀하는 동안 사림은 학문과 이상을 바탕으로 긴밀한 사제관계를 만들어 꽤 다부진 세력을 만든 것이다. 때문에 훈구파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떼죽음을 당하면서도 꿋꿋이 버티어 종국에는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건국 후 약 80년 동안 사림은 정치에 일체 참여하지 않은 채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성종 때에 이르러 정몽주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유학자 길재의 손제자인 김종직이 출사하면서 정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뒤이어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 대개 영남의 사림들이 출사하여 훈구파와 맞서기 시작하여 선조 때까지 약 100여년을 탄압의 세월로 보냈다.

 

 

비운의 개혁가, 조광조

성종 때부터 등용되기 시작한 사림은 주로 삼사에 직을 두었다. 삼사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지칭하는데, 주로 대신들의 비위를 탄핵하거나 임금에게 충고를 하는 역할을 했다. 언론과 감사원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삼사에 자리를 잡은 사림은 필연적으로 끊임없이 훈구파의 비위를 고발하고 탄핵하였는데, 홍문관을 세워 사림 등용에 앞장섰던 성종 때에는 어찌하지 못하다가 연산군 때에 와서 훈구파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훈구파는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작성했다고 고발했고, 이를 계기로 사림들이 대규모로 학살되었다. 바로 무오사화이다. 이어 연산군은 그의 어머니의 폐비에 앞장섰던 이들을 찾아 대규모로 숙청했는데, 이때에도 훈구파에 의해 사림들이 대거 연루되어 죽었다. 물론 이때에는 훈구파, 사림파 가릴 것 없이 많이 죽어서 뒷날 중종반정의 계기가 되긴 하였다.

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은 반정의 주역인 공신들에게 휩싸여 허수아비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종 5년, 1등 공신인 박원종이 죽고, 뒤이어 유순정과 성희안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재위 8년째가 되어서 반정의 핵심 3인방이 모두 죽은 것이다. 이에 중종은 본격적으로 친정에 나서는데, 왕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훈구파를 견제할 사림을 대거 등용했다.

이때 나선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조광조이다. 그는 이미 박원종이 죽던 해에 알성시에 장원급제하면서 도학정치의 이상을 밝힌바 있었고, 그것을 알아본 중종이 조광조를 전격 발탁하였다. 훈구파를 견제할 가장 적합한 인물로 찍은 것이다. 중종의 신임을 얻은 조광조는 출사한 지 2년 만에 정3품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고, 1년도 안되어 다시 종2품인 대사헌이 되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조광조는 현량과를 설치하여 사림이 정계에 진출할 길을 여는 한 편, 위훈삭제를 추진하여 훈구파를 대거 몰아내는 개혁에 서둘렀다. 하지만 반정공신에 대한 위훈삭제는 임금인 중종의 정치적 정당성과도 결부된 것이어서 정치적 부담이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신들을 척결해야 도학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조광조의 믿음이 추진력이 되어 결국 76명의 공신을 삭제하는 성과를 올렸다.

조광조를 앞세운 사림은 권력에 가깝게 다가섰지만, 위훈삭제는 중종의 마음을 돌리고 말았다. 중종은 마지막 남은 1등공신인 홍경주에게 밀지를 내려 조광조를 축출할 것을 모의했는데, 임금이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은 조선 특유의 정치제도 때문이다. 임금의 모든 행동은 사관이 항상 따라다니며 기록했고, 어명은 모두 지금의 비서실 격인 승정원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모두를 사림파가 장악하고 있어 중종은 부득이 밀지를 통해 모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밀지를 받은 홍경주는 날을 맞춰 궁으로 난입하여 사관과 승지들을 결박하고, 중종은 구두로 임시 사관과 승지를 임명하여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을 대거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이것이 바로 기묘사화로 사림들이 가장 많이 희생된 사건이다.

 

 

최후의 승자

사림은 기묘사화로 괴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중앙정치는 훈구파 권신들의 놀이판이 되었고, 두 왕비가문 간의 대결장이 되었다. 중종에게는 세 왕비가 있었는데, 왕이 되기 전의 부인인 단경왕후는 그 아비가 반정의 반대세력이었기 때문에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폐위되었다. 그 후, 제1계비가 된 장경왕후는 세자(훗날 인종)를 낳고 산후병으로 죽어 제2계비로 문정왕후가 새로운 왕비가 되었다. 장경왕후의 오라비인 윤임은 세자를 비호하면서 하나의 파벌을 형성하였고, 마찬가지로 문정왕후와 그의 동생, 윤원형은 새로운 왕자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대립하게 된다. 세간에서는 윤임 일파를 대윤,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 불렀다. 중종이 죽고, 세자가 즉위하자 왕의 숙부가 된 윤임이 일단 먼저 실권을 잡았다.

윤임은 외척이지만, 나름 도학정치를 숭상했던 인물로 사림은 윤임에 의해 다시 등용되어 재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급사하여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이 12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사림에게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어린 임금을 대신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첨정을 하면서 윤임 일파와 그에게 등용되었던 사림이 몰살을 당한 것이다. 이것이 을사사화이다.

네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사림은 큰 타격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들의 이상과 이념은 더욱 투철해졌다. 화를 겪을수록 학문을 통해 이상정치를 찾으려 노력했고, 끊임없이 이를 실현하려 몸을 던졌다. 그렇게 이념과 이상으로 똘똘 뭉친 사림파였기 때문에 다 죽이고 싶어도 죽일 명분이 없었다. 손만 대도 주변이 탁해지는 훈구파와는 달리 털어도 먼지하나 안 나는 사림파의 이황, 기대승, 이준경 같은 인물들이 유배와 낙향, 그리고 출사를 거듭하면서 사화의 와중에서도 자리를 지켜왔다. 이어 이이, 유성룡 등과 같은 인물들이 나와 역사는 사림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선 최초로 직계가 아닌 방계에서 임금을 찾아야했다. 자칫 대혼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후계자의 부재는 중종의 후궁 소생인 덕흥군의 삼남, 하성군이 즉위하면서 정리되었다. 순서로 치면 한참 멀리 있던 하성군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유학자로서의 자질이 뛰어났던 그를 사림에서 눈여겨 보았고, 비록 명종의 교지가 있었다지만 원로대신이면서 세간의 존경을 받았던 이준경이 과감하게 임금으로 모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준경은 사림이지만 원로대신답게 신구 사대부들을 조화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사림을 무대의 전면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왕위에 오른 하성군이 곧 선조다. 그리고 선조는 이이, 유성룡, 정철 등 사림의 대유학자들을 초청하여 바야흐로 조선에 사림의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사림은 집권과 동시에 분당이 되었으니, 바로 당쟁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