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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조선의 당(이원표)

(26호) ① 당쟁이 나라를 말아먹었다?

[조선의 당] ①

당쟁이 나라를 말아먹었다?

 

당쟁 때문에 임진왜란이 발생했나

흔히 우리는 조선의 가장 큰 폐해로 당쟁을 꼽는다. 전란의 와중에도 서로 헐뜯기에만 급급했다하고, 끊임없이 분열하여 나라를 말아먹은 가장 큰 원인이라 지목되었으며, 이를 비하하여 ‘붕당(朋黨)’이라 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역사서는 당쟁에 매몰되어 전란을 방지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조선에서 당쟁이 발생한 것은 1572년경(을해당론)이고, 임진왜란은 그로부터 20년 뒤인 1592년에 발생했다. 과연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이 20년간의 당쟁을 보고 침략을 결정했을까, 또 이 20년간의 당쟁이 국방력을 극적으로 허문 계기였을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조선의 방위전략은 기본적으로 여러 거점의 산성을 이용하여 적을 교란시키는 한 편, 내부로 끌어들여 포위하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확장될 영토가 있는 중국을 상대로 한 전략일 뿐이었다. 하지만 산지가 북쪽으로 뻗어있기 때문에 중국을 상대로는 효율적일 수 있지만, 일본을 상대로는 적당하지 않은 전략이다. 그리고 일본은 대체로 해적 이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해안가 마을의 소개와 함께 수군과 육군이 합공하는 형식을 취하는 편이었다. 즉, 국방력이 약화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일본을 상대로 한 전략이 부실했던 것이다.

흔히 율곡이 전란을 예상하여 10만양병설을 주장했는데, 동인이 이를 반대하여 전란을 맞았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율곡의 10만양병설은 8도에 각각 1만, 그리고 서울에 2만을 비치하였다가 전란 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골자로 앞서 말했던 조선의 전통적인 방위전략을 강화하는 표현이다. 10만양병설의 진위에 대한 논란도 있지만 사실이라 하더라도 대일본 전략이라고 보긴 힘들다. 오히려 이순신을 발탁하여 수군을 강화시키려했던 동인의 유성룡이 더 일본에 대한 방위에 관심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성룡은 후에 서인 정권으로부터 율곡의 선견지명을 가로막은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되었다. 그런데 사실 서인들은 수군을 해체하려 하기까지 했다.


전락 직전의 시점에서 살펴보자면, 동인과 서인 모두 각각의 논리가 있었다. 송시열 이후 장기집권 체제에 들어간 서인에 의해 동인의 논리는 결과론을 통해 모두 비난받아야했지만, 따지고 보면 전란의 최일선에 있었던 것은 거의 모두 동인이었다.

 

쇠약한 조선은 언제부터?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는 숙종 때이다. 시호와는 다르게 조선에서 가장 정치적이었고, 스캔들 무성한 왕이었던 숙종은 당쟁을 적극 활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다. 원래 조선은 왕권보다는 신권이 강하여 대신들이 ‘통촉하여주시옵소서’라고 부르짖으며 버티면 아무리 왕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나라였다. 그걸 무시하면 연산군처럼 되는 법이다. 그런데 숙종은 거의 유일하게 신하들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였던 왕이었다. 그리고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사대부들은 처신을 잘 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국가로서도, 또 백성으로서도 득이 되는 일이었다. 다행히 숙종은 폭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도 적극적으로 남인과 노론을 번갈아 중용하면서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조선의 발전을 도모했다. 그러면서 왕권 강화를 위한 탕평책을 썼는데, 정조 사후 이것이 오히려 조선에 독이 되었다. 소위 탕평파로 등장한 이들은 정조말기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면서 당쟁을 없애갔고, 특히 송시열 이후 장기 집권하던 노론을 무너뜨렸는데 당쟁이 없어진 가운데 독보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탕평파는 정조 사후 세도가를 형성했다.

이렇게 물어보면 간단하게 답이 나온다. 당쟁이 더 해악한가, 세도정치가 더 해악한가. 요즘식으로 하면 정당간의 정쟁으로 인한 혼란이 더 해악한가, 아니면 독재정치가 더 해악한가.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숙종-영조-정조 시대는 조선의 중흥기였다. 반면, 당쟁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한 세도가의 시대였던 순조-헌종-철종 때, 조선은 점차 몰락해갔다.

 

당쟁의 역할

당쟁의 시원은 퇴계와 율곡의 정치와 학문에 대한 견해에서 찾을 수 있고, 이들의 제자 혹은 영향력에 있던 이들로부터 당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비록 자리에 대한 소소한 다툼이 당쟁을 촉발시키기는 했으나 대체로 이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명분이었고, 아무리 실리가 있어도 명분 없이 움직이진 않았다. 그래서 항상 결과적으로는 한 편의 이야기가 그릇되어 보일 수는 있지만, 양측의 논쟁은 서로의 논리를 개발,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국상의 복식을 두고 벌인 논쟁 등은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정말 쓰잘데기없어보인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논쟁을 현재의 시점에서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그리고 그 복식 논쟁도 결국은 왕가의 정통성이 배경으로 있던 것이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중요하지 않을 수 없었던 논쟁이었다. 그리고 대동법 같은 백성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논쟁도 있었다.

조선의 당쟁이 현대의 정당정치와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정당에 대해 선택할 수 있는 주권자가 국민이지만, 조선의 주권자는 왕이라는 점이다. 현대의 정당은 국민을 향해 정치를 하지만, 조선의 당쟁은 왕을 향해 있었다. 따라서 왕이 얼마나 현명하냐에 따라서 당쟁은 국가에 득이 되기도 하고, 실이 되기도 했다. 사대부들의 입장에서는 왕을 어떻게 구워삼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피 말리는 정치게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논쟁은 굉장히 소모적인 과정이다. 때문에 논쟁이 잘못 흘러가면 논쟁의 당사자건, 그 결과에 영향을 받는 제3자건, 이해관계 없이 지켜보는 사람이건 모두 방향을 잡지 못해 허우적거리게 된다. 그러나 더 위험한 것은 논쟁을 수용하지 않고 일방으로만 나아가는 것이다. 그 방향에 기름진 땅이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낭떠러지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느리더라도 논쟁을 수용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다. 조선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보아야한다. 현대의 시점에서 굉장히 소모적으로 보이겠지만 당시의 그 논쟁은 조선의 정치사회를 좌우하는 것이었으며 어느 일방으로 흐르지 않는 균형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조선은 그 균형추가 사라지고 나서 본격적인 세도가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그대로 병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