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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조선의 당(이원표)

(31호) ⑥ 나라를 구한 세자, 광해군

나라를 구한 세자, 광해군


묘호가 없는 임금

임금의 호칭에는 두 가지가 있다. 연호와 묘호이다. 연호는 햇수를 세는 기준이지만 보통은 임금의 즉위와 함께 연호를 새로 제정하기 때문에 연호를 임금의 호칭으로 쓴다. 하지만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한 터라 독자적으로 연호를 쓰진 않았다. 훗날 고종이 스스로 독립국임을 내세워 황제 칭호를 사용했을 때 비로소 연호를 가졌다. 따라서 고종황제는 사용한 연호를 따서 광무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임금이 죽고 난 뒤에 그의 공적을 기려 묘호를 만들어 부르는데, 조선에는 죽고 나서 이 묘호를 받지 못한 임금이 세 명이 있었다. 가장 먼저 세조에 의해 폐위된 단종은 왕위에 쫓겨나 노산군으로 강등된 뒤 살해되었는데, 숙종 때가 되서야 단종이라는 묘호를 받고 복위되었다. 실록도 노산군일기라는 이름으로 보관되었다가 후에 단종실록으로 재편찬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연산군과 광해군이 있다. 이들은 모두 쿠데타에 의해 폐위된 왕이며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은 이 둘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죽고 나서도 묘호를 받지 못하고, 왕자 시절의 이름을 그대로 임금의 호칭으로 역사가들이 기록하고 있다.

연산군은 대표적인 폭군으로서 그의 학정에 백성들이 시달려 반정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가 있었다. 또, 형식상 자신의 계모가 되는 성종의 후궁들을 때려죽이고, 할머니인 소혜왕후를 머리로 들이받아 죽인 사건은 사대부들이 들고 일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광해군의 경우에는 좀 다르다. 광해군 역시 계모인 선조비 인목대비를 폐서인한 것이 반정의 명분이 되었으나 연산군처럼 죽인 것도 아니고 궁궐 한 쪽에 유폐시킨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의 개혁정치는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반정이 일어났을 때, 반정세력은 백성의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 그래서 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남인을 끌어들여 공동으로 연립정부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의 활약

적자를 기다렸던 선조는 적자가 없다면 현재 곁에 있는 인빈의 소생 중에서 세자를 세우고 싶어 했다. 서장자인 임해군과 서차남인 광해군의 어머니인 공빈은 이미 죽고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자연히 그 아들들에 대해서도 소홀해 진 것이다. 인빈의 첫 번째 아들인 의안군(서3남)은 일찍 죽었고, 넷째인 신성군이 선조의 마음에 있었는데, 세자 건저 문제가 거론되었을 때, 장성한 형들을 제치고 세자가 되기에는 신성군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 게다가 망나니짓을 하고 다니는 임해군과는 달리 광해군은 신하들의 신망을 받을 정도로 명석하고 유능했다. 그래서 선조는 신성군이 좀 더 자라 재능을 보이기를 기다리는 마음에 광해군을 세자로 주청한 서인들을 몰아낼 정도로 광해군에 대해 싸늘하게 대했다.

그 때 바로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왜군을 피해 선조는 궁을 버리고 달아나야 했다. 일촉즉발의 위기에 후계자의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피난 도중에 선조는 급히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분조를 맡겼다. 이렇게 광해군은 전쟁이 아니었다면 세자가 되기 힘든 위치였다. 그래서 그는 전쟁에서 공을 세우기 위해 필사적이었을 지 모른다.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은 분조를 맡아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명목상으로는 ‘누란의 위기에 두 궁이 함께 있으면 사직이 위험하다’는 신하들의 진언에 따른 것이지만 실제로는 임금인 선조는 뒤로 물러나고 대신 세자를 전선에 내몬 것이다. 광해군은 강원도로 가 민심을 수습하고, 군사를 모집하여 왜군을 물리치는 전과를 거두면서 교묘하게 적진을 돌파해갔다. 평안도와 황해도와 경기도를 거쳐 강원도까지 돌아다니며 군사를 모집하고 왜군을 물리치는 과정에 흩어졌던 신하들도 광해군의 곁으로 모이는 등 전쟁동안 광해군이 이끄는 분조가 사실상의 정부 역할을 했다. 왜군이 들이닥치자마자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 임금에 대해 백성들은 크게 실망하고 좌절했는데, 선조와 비교되는 광해군의 이런 활약은 백성들의 큰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광해군의 활약과 더불어 의병 운동도 더욱 활발해졌고, 군사 모집에 응하는 백성들의 수도 더욱 많아져 기울었던 전세가 균형을 찾아갔다.

광해군이 이런 활약을 하는 동안 라이벌인 신성군은 전란 중에 죽었다. 그리고 그의 친형인 임해군과 이복동생인 순화군도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해 각각 함경도와 강원도로 파견되었지만 일을 하기도 전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군에 붙잡히는 수모를 겪었다. 때문에 전쟁 이후, 그의 지위는 더욱 확고해졌다.


비운의 영웅들

임금은 나라를 버리고 자리를 떴지만, 세자가 분조를 통해 나라를 다시 세우고 있었다. 그러자 세자 광해군을 따라 사대부들도 붓을 버리고 칼을 쥐기 시작했다. 충청과 호남에서 조헌과 고경명 등이 의병을 일으켰고, 가장 치열했던 경상도에서는 곽재우, 정인홍 등이 의병을 모아 싸움터에서 활약했다. 특히 이순신이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곽재우의 활약은 더욱 두드러졌다. 곽재우는 조식의 문하로 학파로 따지면 북인에 속했다.

이순신과 의병장들의 활약으로 전세가 회복되고, 명의 원군이 도착하자 왜군이 서서히 고립되기 시작했다. 무능했던 관군도 어느덧 권율 등의 다져진 명장들의 손에 의해 거듭나 행주대첩, 진주대첩 등의 승리를 일궈갔다.

이렇게 전세가 좋아지자 자연 전공에 대한 시시비비가 벌어졌다. 당연히 국난을 헤친 영웅들에 대한 백성들의 신망이 높아진 상태였다. 이에 대해 서인은 강한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서인의 영수인 성혼이 피난길에 오른 임금의 행렬을 놓친 데다가 전세를 뒤집는데 가장 공이 큰 이순신이 남인인 유성룡이 추천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장 치열한 전장에서 ‘홍의장군’으로 추앙받는 곽재우가 남명 조식의 문하이니 그가 비록 북인에 가담하고 있지 않다지만 서인으로서는 큰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위기감은 서인만 가지고 있던 게 아니었다. 임금인 선조도 마찬가지였다. 백성들은 세자를 임금처럼 모시고, 자신이 내친 신하들이 의병장으로 맹활약하고 있으니 말이다. 때문에 임금과 서인은 묘한 결속감이 생겼다. 그들은 영웅들의 공을 깎아내리는 한 편, 하루빨리 전쟁이 끝날 수 있도록 화친을 서둘렀다.

‘임진왜란 = 이순신’이라 할 만큼 전쟁에 가장 큰 공이 있는 이순신은 서인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다. 그러다 결국 출병하라는 왕명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나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사실 그가 출병하지 않은 것은 ‘수륙양병’으로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전술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수군만으로도 충분하다며 큰 소리를 친 원균은 후임으로 부임하고 나서 이순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시인했다. 그러나 원균의 이런 태도에 부아가 난 권율이 원균을 비꼬며 곤장을 치자 원균은 전군을 끌고 출병했다가 몰살당했다.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가 되어 열악한 전력으로 왜군을 막아 혁혁한 전공을 세우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전사하고 말았다.

홍의장군 곽재우와 막역한 사이였던 의병장 김덕령은 전쟁 중 일어난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 김덕령은 의병을 모아 반란을 진압하러 가던 중 이미 난이 진압되어 돌아갔는데 어이없는 무고를 당한 것이다. 사실 이는 예전에 그가 윤두수 형제에게 밉보였던 것이 화근이 되어 죽음까지 간 것이다.

당시 동인으로 분류되던 우의정 정탁은 김덕령과 이순신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결국 이순신은 살려내었지만, 김덕령은 고문에 못 이겨 장살되고 말았다. 김덕령 수하에는 최담령, 최강 등 용사들이 많았는데, 모두 김덕령이 죽는 것을 보고 힘을 감추며 행동했고, 홍의장군으로 명성을 날렸던 곽재우 역시 이순신이 죄 없이 잡혀 들어가고 김덕령이 누명을 쓰고 죽는 것을 보고는 권력에 회한을 느껴 평생 벼슬을 사양하며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의병장 중에서 죽지 않고, 후대까지 활약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 정인홍이다. 그는 전쟁 때 의병을 일으켜 성주, 합천, 함안 등지에서 맹활약했고, 전쟁 이후에는 광해군 옹립을 주도하면서 대북정권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영화도 인조반정으로 끝이 났다.


전쟁은 끝났지만, 당쟁은 불타오르고

전쟁 중에는 각 당이 자기 역할을 비교적 잘 찾았다. 성혼, 이항복 등 서인은 임금을 수행하며 조정을 지켰고, 이산해, 정인홍 등 북인은 광해군과 함께 전선에서 의병활동을 북돋우면서 전쟁을 지휘했다. 유성룡, 이덕형, 정탁 등 남인은 이순신 등 명장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한 편, 명군의 지원을 얻어냈다. 이렇게 각자의 생각에서 전쟁을 이길 수 있는 방법들을 총동원하여 국난을 헤쳐 갔던 각 당은 전쟁이 끝나자 공의 대소를 다투기 시작했다. 특히 북인은 화친을 주장한 남인을 매국행위로 철저히 몰아세웠다.

하지만 이들이 당쟁에 몰두하기에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가 너무 끔찍했다. 경작지의 66%가 파괴되었고,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백만명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 민가와 관청을 막론하고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 없었고, 광해군이 임금으로 오른 뒤에도 개인저택을 궁궐로 사용해야할 정도로 피해 복구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가뜩이나 의심 많은 임금인 선조는 전쟁 뒤에 더 유약해지고 줏대가 없어졌다. 자기보다 잘나 보이는 세자를 끝까지 질투하고, 신하들의 다툼을 더욱 부추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든 것이다. 그에 반해 광해군은 지금 당장 조선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당쟁의 한 가운데에서 북인을 골랐다. 조선을 개혁하기 위해 가장 현실적인 당파를 파트너로 삼은 것이다. 이산해가 정권을 잡기 위해 자기를 이용했던 과거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광해군과 북인이 순조롭게 정권을 잡기까지는 무수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조가 죽기 바로 직전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