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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조선의 당(이원표)

(33호) ⑧ 서인의 조선

명목뿐인 연립정부

“갑자기 광해군이 폐출되고 새 임금이 세웠다는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새 임금이 성덕이 있는 줄 알지 못했으므로 상하가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중략) 위세로써 진압할 수도 없어서 말하기 지극히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오리 이원익이 전 왕조 때의 원로로서 영상에 제수되어 여주로부터 입조하자 백성들의 마음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인조반정의 핵심인물이었던 이서(李曙)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쿠데타로 임금을 바꾸었지만 민심은 이를 쉽게 수긍하지 못하고 있었다. “위세로써 진압할 수도 없어서”라고 했을 정도로 민심의 이반을 겪고 있던 것이다. 자칫 새로운 난에 휩싸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서인은 남인의 원로,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전격 추대한다.

폐모론에 반대하여 여주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이원익은 77세의 노구를 이끌고 조정에 복귀하였고, 이로써 서인과 남인의 연립정부가 구성되었다. 하지만 연립정부는 명목뿐이고, 정국의 주도권은 모두 서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반정 주도자인 김류는 “이조참판 이하는 쓸 수 있지만 이조판서 이상 및 의정부에는 남인을 못한다.”라고 표명할 정도로 권력에 대한 서인의 의지는 분명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서인은 정권유지책의 하나로 ‘국혼물실(國婚勿失)’을 내세워 왕비는 무조건 서인 가문에서 내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서인은 원래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는 당파였고, 잘 알다시피 이이는 대공수미법 등을 주장하고, 병제의 개편을 추진하는 등의 개혁적인 정치인이었다. 물론 당시 개혁의 대상이 훈구파이긴 했지만, 그 정도로 개혁세력이었던 서인이 권력을 향한 아집의 당파로 전락한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한 번 언급하겠지만 이이가 추진했던 대공수미법(대동법)의 가장 큰 반대자가 서인이라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연립정부에 참여한 남인은 비록 영의정의 자리를 얻었지만, 실권 없는 민심수습용으로 얼마 안 가 팽 당하고 만다. 이렇게 인조반정 이후의 당쟁은 서인이 주도권을 가진 채, 남인이 도전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서인 내부의 또 다른 권력투쟁으로 전개된다.


이괄의 난

당파가 추구하는 이상은 멀리가고, 당파의 목적은 권력만 남았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이괄의 난’이다. 이괄은 인조반정의 핵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반정군의 대장을 맡기로 한 김류가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자 몸을 빼 거사 당일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괄이 그를 대신하여 군사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괄은 2등 공신으로 밀려나 외직을 축출되었다. 그도 모자라 중앙의 서인들은 아예 역모로 몰아 제거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를 눈치 챈 이괄이 먼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19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선조의 또 다른 아들인 흥안군을 임금으로 세웠다. 반정이 일어난 지 1년만에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서울을 버리고 공주로 피난을 간 인조와 서인정권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이괄의 반란군을 진압했다. 대세가 기울자 이괄은 부하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서울을 버린 지 불과 30년이 지나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또 다시 정부가 서울을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게다가 이괄의 잔당들은 후금(後金)으로 도망쳐 조선의 사정을 알려주었고 그것이 침입의 빌미가 되었다. 국난을 당해 나라를 다시 세우는데 힘써도 모자를 판에 권력을 둘러싼 서인의 이전투구가 다시 국난을 불러오는 셈이었다.


일촉즉발의 동북아시아 정세

조선은 이토록 내부 권력투쟁에 정신을 잃고 있었지만, 당시 동북아의 국제정세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오랜 기간 북방민족과 한족이 대립하는 가운데 한반도는 세력의 우위에 따라 위치가 달라졌다. 조선 초에는 한족이 세운 명(明)이 중국을 지배하면서 북방민족은 명(明)의 지배하에 있었고, 조선 역시 명(明)에 대한 사대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촉발되면서 일본의 역할이 두드러지기 시작했고, 명(明)이 여기까지 신경을 쓰게 되자 북방민족에 대한 관리가 소홀해져 특히 만주족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만주족(여진족)은 12세기 무렵 금(金) 왕조를 세워 송(宋, 한족)을 압박할 정도였지만 다른 북방민족인 몽고에 패망한 이후 만주에 흩어져 살았다. 명(明)조에는 해서(海西), 건주(建州), 야인(野人)의 3부로 나뉘어 통치를 받았다. 명(明)은 만주의 여러 부족을 분열하여 통치하는 방식을 택했는데, 임진왜란 이후 차츰 통제력이 약화되어 갔다. 그것을 틈타 건주(建州)의 수장 중에 하나였던 누르하치가 만주족을 통일하여 후금(後金)을 세워 명(明)에 대항하게 되었다.

명(明)은 이를 제압하려 군대를 동원했지만 오히려 대패(1619)하여 요하 동쪽을 모두 후금(後金)에 내주었다. 동북아의 정세가 점점 만주족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던 것이다. 광해군은 이 전쟁에서 명(明)의 요청으로 원군을 파병했지만 강홍립에게 유리한 쪽에 붙으라는 밀지를 내려 강홍립은 후금(後金)에 투항하여 임금의 뜻을 전했다. 이렇게 광해군은 명(明)에 원군을 파병하면서도 후금(後金)에 따로 밀사를 보내는 등의 등거리 외교로 실리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반정의 명분 중에 하나였다. 명(明)에 대한 강력한 사대와 배금(排金)정책을 취한 서인은 이런 일촉즉발의 동북아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스스로 난을 자초하고 말았다.


서인, 권력의 아귀다툼

반정 직후 서인은 공서(公書)와 청서(淸西)로 나뉜다. 훈서(勳西)라고도 불리는 공서파는 김류를 중심으로 반정으로 공신이 된 집단이다. 반면에 김상헌 등 반정에 소극적이었던 이들은 청서라 불렸다. 김상헌은 남한산성에서 항복문서를 찢으며 오열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었다. 당연히 공서파가 정국을 쥐었는데, 이들은 또다시 살아남은 북인들에 대한 태도로 갈리었다. 대북은 거의 사라졌지만, 광해군이 아닌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소북은 상당수가 살아남았는데, 김류가 소북의 영수인 남이공을 대사헌으로 등용하려 했었다. 김류는 안정적으로 정국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남인 등과 연합해야한다고 생각했는데, 소북까지 등용하려 하자 이귀 등의 소장파가 반발하고 나섰다. 그래서 연립정부를 주장하는 김류 등의 노장파는 노서로, 이귀 등 소장파는 소서로 분리되었다. 대개 원로 축에 드는 청서파는 노서로 힘을 실어 연립정부를 함께 주장했다.

정권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공서는 후에 원당과 낙당으로 분열되어 심한 권력다툼을 벌였다. 원당의 영수인 원두표는 반정 초기 청서파를 상당히 탄압했던 인물 중에 하나였다. 원두표는 함께 반정을 도모했던 김자점과 심하게 대립했고, 이 둘을 중심으로 원당(원두표), 낙당(김자점)으로 나뉘었다.

쿠데타로 갑자기 권력을 쥐게 된 서인은 본래 이이가 가졌던 이상과는 다르게 권력을 독점적으로 향유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혀 서로 아귀다툼을 벌였다. 서인은 효종 때가 되어서 송시열이라는 걸출한 학자이자 정치인을 만나 중심을 잡게 될 때까지 정묘․병자년의 국난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전투구를 거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