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재/조선의 당(이원표)

(32호) ⑦ 쿠데타로 끝난 광해군의 정치

  조선의 당 ⑦
 
쿠데타로 끝난 광해군의 정치



서러운 서자는 피를 토하고

서자도 아닌 서손으로, 그것도 셋째로 태어나 왕이 된 임금, 선조. 역사가들은 항상 그를 설명할 때, 방계 콤플렉스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서열로는 한참 멀어있던 그가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을 갖춰 여러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방계 콤플렉스’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것은 바로 광해군에 대한 그의 처사 때문이다. 선조가 광해군의 지위를 끊임없이 흔들었던 것이 서자여서 인지, 아니면 부자간도 나눌 수 없는 권력의 속성 때문인지는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국난의 시기에 세자로서 위기를 극복한 광해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선조는 ‘방계 콤플렉스’라는 역사가들의 평을 듣게 되었다. 그로서는 좀 억울한 평가일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한 행동에 비추어 보면 별로 부당할 것도 없어 보인다.

선조가 항상 광해군을 멀리하진 않았다. 세자가 되기 전에는 신성군을 더 가까이 하였지만, 전쟁으로 그가 죽고 나서는 전란을 멋지게 헤친 세자에 대해 아버지로서의 자랑스러움과 안타까움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피난 중에 망국의 죄는 자신이 갖고 가겠으니 다른 이들은 세자를 보필하라는 전위의 뜻을 내리기도 하였다. 또, 분조를 이끄는 세자에게 직접 편지로 “나는 살아서 망국의 임금이니 죽어서 이역의 귀신이 되려한다. 부자가 서로 떨어져 만날 기약조차 없구나.”라며 회한을 토로하기도 했다. 광해군은 아버지의 편지를 읽고 밤새 통곡했다. 그러나 이런 애틋한 부자의 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고 3년, 자식이 없던 의인왕후가 사망하고, 2년 뒤에 김제남의 딸이 중전에 올랐다. 그녀가 바로 훗날 인목대비인데, 국혼이 있은 지 4년이 되던 때에 그녀에게서 영창대군이 태어났다. 선조의 나이 54세, 그와 왕실이 그토록 바라던 ‘적자’가 탄생한 것이다. 적자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젊고 고운 왕비의 아들이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선조의 마음은 ‘적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영창대군에게 급속도로 기울어졌다.

광해군에게 마음이 떠난 선조는 세자로서의 지위까지 부정하려 들었다. 당시 광해군은 아직 명나라로부터 세자 책봉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선조는 문안을 온 광해군에게 “명나라의 책봉도 받지 못했는데 어찌 세자 행세를 하는가? 다음부터는 문안하지 말라.”고 꾸짖었다. 선조의 이 한마디에 광해군은 돌아와 서러움에 피를 쏟았다. 그가 전쟁을 거치며 피땀을 흘려 어렵게 일군 세자로서의 지위가 단지 후궁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돌도 안 된 아기에게 그렇게 쉽게 밀리니 어찌 서럽지 않겠는가. 게다가 폐세자가 된다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은 죽음밖에는 없었다.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한 광해군이지만, 일생 최대의 위기가 닥친 것이다.
 

소북과 대북

조선이 아무리 왕조국가라지만, 임금 마음대로 세자를 폐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광해군은 신하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광해군을 따랐던 북인 중에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세력이 생겼다. 이는 임금의 마음이 떠난 것보다 더 큰 문제였다. 영창대군이 있기 전에는 모든 당이 세자로서 광해군을 지지했기 때문에 선조의 의중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선조가 광해군을 아껴서 세자가 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하들의 공론을 모아 세자가 되었는데, 이제 그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당장 영의정이던 유영경이 광해군에게 등을 돌렸다. 그는 영창대군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백관을 거느리고 하례를 청했다. 이에 좌의정 허욱과 우의정 한응인이 만류했는데, 이처럼 영창대군을 위해 모든 신하들을 데리고 가려했던 것처럼 세자의 지위가 흔들렸다. 그리고 유영경을 중심으로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이들은 소북이 되었고, 의병장 정인홍 등은 여전히 광해군을 지지하여 대북으로 남아 집권세력인 북인이 나뉘었다. 게다가 처음에 백관의 하례를 만류했던 허욱과 한응인도 소북에 가담하여 임금과 삼정승이 모두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모양이 되어버려 광해군의 목을 더욱 짓눌렀다.

거기에 명나라까지 세자책봉을 거부하고 있으니 광해군으로서는 참 답답할 노릇이었다.
 

명나라는 왜?

명목상 조선은 명의 제후국이었다. 원나라 때에는 원(元) 황제가 고려국왕을 실제로 폐하기도 하고 임명하기도 했지만, 명(明) 황제에게 그런 힘은 없었고, 조선은 사실상 독립국이었다. 그러던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지원군을 파병하더니 자신감이 붙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명나라가 세자 책봉을 거부한 것은 내정에 대한 간섭 욕구 때문이었다. 명나라는 자신의 힘으로 임금을 만들어 명목뿐이던 제후국에 대한 지배를 실제로 행사하고 싶었다. 그 임금이 광해군이던, 임해군이던, 영창대군이던 관계는 없었다. 게다가 당시 눈에 띄게 성장한 만주족의 움직임 때문에 더욱 조선을 지배할 필요가 생겼다. 그런 이유로 명나라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거부하고 가능하면 자신들의 힘으로 세자를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명나라가 지원군을 파병했고, 조선의 사대부들이 사대주의자들이더라도 내정간섭이 쉬운 일이 아니다. 또, 광해군을 ‘아니다’라고 할 만큼의 절대적인 명분도 없었고, 자칫 만주족과의 사이에서 조선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조심할 필요도 있었다. 그래서 일단 소극적인 ‘거부’로 조선의 정세를 살폈다. 만약 조선에서 ‘명의 책봉 거부’를 핑계로 폐세자를 택한다면 그만큼 명이 조선에 대해 간섭할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광해군, 왕이 되다

하지만 캄캄한 광해군의 앞길이 갑자기 트였다. 선조가 죽은 것이다. 만약 선조가 몇 년 만 더 살았어도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선조가 병에 걸려 누웠을 때, 영창대군은 겨우 두 살배기에 불과했다. 10년 남짓은 대비가 수렴청정을 할 수 있겠지만, 18년을 그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소북은 무리수를 두었다. 영의정이던 유영경은 세자인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교서를 숨겼다. 이런 무리수에 소북이던 남이공 등은 유영경에 반대하여 남당으로 모였다. 그리고 여전히도 광해군을 반대하던 유영경 무리는 유당으로 모여 영창대군 즉위를 꾀했다. 이들은 선조가 죽자 인목대비를 찾아가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고 수렴청정을 할 것을 종용했다. 만약 인목대비가 과거 천추태후같은 여걸이었다면 유영경과 손잡고 광해군을 쳐내어 권력을 잡으려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인물이 흔한 게 아니다. 평균적인 사대부의 딸이었던 인목대비는 16년 동안이나 세자의 자리를 지킨 33세의 광해군을 두고 두 살배기의 영창대군을 단지 ‘적자’라는 타이틀 하나만으로 왕위에 올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25살의 나이에 왕실의 가장 어른이 된 그녀는 광해군을 즉위시킨다는 교지를 내렸다.

인목대비의 글씨

인목대비의 글씨

 


광해군의 패착, 숙청과 폐모

광해군과 그의 파트너 대북정권은 대동법을 실시하여 문란한 세정을 바로잡았다. 또, 전쟁으로 불타버린 서적들을 재간행하고 허준을 등용하여 동의보감을 편찬하는 등 문화사업에 힘썼다. 그리고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황폐화된 농지 개간을 촉진시켜 경제를 안정시키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았다. 대외적으로는 명(明)에 대한 사대정책을 버리고, 만주족이 세운 후금(後金)과 등거리 외교를 펼쳐 국제정세에서 실리를 택하였다. 그런 광해군과 대북이 실정을 하나 했는데, 그것이 패착으로 이어져 정권의 막을 내리게 하였다. 그것이 바로 반대파에 대한 ‘숙청’, 그리고 폐모(廢母)였다.

사실 광해군의 즉위를 반대하여 군대까지 동원한 유영경과 소북의 행위는 분명한 반역행위여서 이들에 대한 처단은 어느 정도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왕이 되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은 왕이 되어서까지 불안감을 갖게 했고, 그것은 반대파에 대한 관용을 없애버렸다. 그래서인지 소북에 대한 처단은 도가 지나쳐버렸다.

유영경 등 소북 중에서 남당일파는 즉위와 동시에 당연히 제거되고, 대북정권 아래 야당으로는 서인과 유당일파가 맥을 잇고 있는 소북, 그리고 남인이었다. 광해군과 대북은 반대파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인 소북을 철저히 탄압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념이 다른 서인과 남인보다는 같은 학파에 속해있는 소북이 더 위험해 보였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동생에게 왕위를 도둑질 당했다고 철없이 떠드는 임해군은 하릴없이 피를 뿌렸고, 영창대군은 폐서인 되었다가 살해당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북을 보호하고 있었던 인목대비에게까지 숙청의 칼이 다가왔다.

하지만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자기보다 9살이나 어린 계모일지언정 아들이 어머니를 폐하는 것은 용납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왕위를 두고 형제간에 피를 보는 것은 부지기수이지만 부모에게 칼을 겨누는 것은 곧 패륜이었고, 연산군의 예가 있었다. 아무리 소북이 밉고 그들이 대비를 방패로 세우고 있다고 해도 폐모(廢母)는 정말 큰 무리수였다.

폐모에 반대하여 남이공 등의 소북은 말할 것도 없고, 서인의 이항복 등과 남인의 이원익 등 원로대신들이 귀양을 자처했다. 대북 중에서도 틈이 생겼는데, 정인홍의 제자였던 정온은 사제관계를 끊고, 유몽인 등과 중북으로 모였다. 중북은 인조반정 후에 대개 남인으로 흡수되었다.

이처럼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이었던 대북에서도 틈이 벌어질 정도로 폐모는 시끄러웠다. 그리고 인목대비는 결국에는 폐서인되어 서궁에 유폐되었다. 대북은 끝까지 인목대비를 죽이려하였지만, 광해군이 그것만큼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대북의 지나친 행동은 결국 반정의 명분이 되었고, 반정 뒤에 대북은 정파로서 존재를 상실했다.

인조반정이 거두어 간 것들

재야에서 기회를 엿보던 서인은 이귀, 김자점, 최명길 등의 주도로 반정을 일으켰다. 이들은 선조의 서손인 능양군을 추대했는데, 능양군은 선조가 아끼던 신성군의 친동생, 정원군의 아들이면서 신성군의 양자이기도 했다.

인조반정은 당장 광해군의 개혁정치를 중단시켰다. 당연히 대동법이나 양전사업으로 혜택을 보던 농민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광해군이 패륜이었을지는 몰라도 전란으로 황폐해진 민중의 마음에는 영웅이었다. 그래서 반정세력은 왕위에서 끌어내린 광해군을 죽이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폐모에 반대하여 귀양갔던 남인의 원로,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모셔야했다. 그렇게 서인과 남인의 연립정부가 구성되었다.

대북은 거의 숙청되거나 남인에 흡수(중북)되어 정파로서 존재를 상실했다. 소북은 이미 대북에 의해 거세된 상태여서 겨우 명맥만 유지하였다. 어쩌면 조선을 전혀 다른 길로 이끌었을지도 모를 남명학파가 허무하게 사라져버린 것이다.

또, 인조반정은 당쟁의 성격을 크게 변화시켰다. 인조반정은 이때까지 와의 왕권다툼과는 의미가 달랐다. 단종의 폐위는 왕위를 두고 벌이는 왕가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왕조체제의 전형적인 권력다툼이라 볼 수 있다. 연산군의 폐위는 폭군에 대한 (지배계급을 포함한)다수의 저항이었다. 그에 반해 광해군의 폐위는 당쟁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고, 이는 조선의 정치사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쟁이라는 것은 집권을 위해 벌이는 주권자를 향한 투쟁이다. 현대의 주권자는 국민이지만, 왕조시대의 주권자는 국왕인데, 당쟁의 결과로 국왕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왕이 주권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광해군 이후로는 왕조차도 하나의 당인이 되어갔다.

이렇게 주권자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당쟁은 이제 서로가 서로에 대한 부정으로 일관했고, 그것은 곧 살육의 정치로 치닫게 되었다. 정치가 주권자를 향하지 않고, 그저 권력만을 탐했을 때, 그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 지 이제 인조 이후의 당쟁에서 확연히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