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재/조선의 당(이원표)

(34호) ⑨ 병자호란, 국난을 자초하다

[연재] 조선의 당 ⑨

병자호란, 국난을 자초하다

이원표 (편집위원)



광해군의 실리외교, 그러나

북방민족의 하나인 여진족은 한 때, 송나라(한족)를 압박하여 중원을 노릴 정도로 강성했었지만, 몽골족의 등장으로 패망하여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러다 명나라 말기인 1616년에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정하고 명나라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광해군 재위 9년째 되는 해로 한창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러다 2년 뒤인 1618년(광해군 11년), 명나라(한족)와 후금(여진족)은 요동에서 격돌하게 된다. 명나라는 조선에 원군을 청하는데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바쁜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명나라의 요구에 소극적이었다. 또, 당시 명과 후금의 기세가 팽팽하여서 양쪽 다 조선의 행보에 따라 전세가 바뀔 수도 있는 처지였고, 이를 파악한 광해군은 여기서 실리를 취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실제로 후금도 조선에 원군을 보내지 말 것을 주문하는 등 조선에 대한 외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명과의 의리를 중시하는 사대부의 나라, 조선에서 무작정 파병을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여 요동에 파병했다. 그러면서 강홍립에게 밀지를 내려 후금과도 교류하면서 전세를 관망하다 유리한 쪽에 붙으라고 지시하였다. 밀지를 받은 강홍립은 전투에 형식적으로 응하면서 명과 후금을 지켜보았는데 10만명의 명군은 몇 번의 전투에서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명군이 패배한 뒤, 강홍립은 고립된 조선군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했다. 그리고 파병을 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사정을 설명하여 후금의 이해를 얻어 내었다. 명나라를 위해 파병하면서 후금에게도 이해를 구한 광해군의 실리 외교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광해군은 후금에 대하여 전의가 없음을 표명하면서도 북방의 수비를 강화하고, 명나라 모문룡에게 평안북도 철산에 주둔하게 하는 등 명과 후금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

하지만 4년 뒤,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폐위되고 대북은 실각하고 말았다. 그리고 정권을 잡은 서인은 강력한 배금정책을 취했다. 명과의 결전을 앞두고 있던 후금은 배후에 있는 조선의 이런 변화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명을 치기 전에 조선부터 잡아야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게다가 승승장구하던 후금군은 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명군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입고, 누르하치가 사망하고 말았다. 뒤를 이은 홍타이지(훗날 청태종)는 원래가 조선에 대한 주전론자였는데, 명과의 전투에서 지고 칸이 죽기까지 하자 더욱 더 배후의 위협을 제거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그 조선이 배금정책을 펼치고 있던 서인의 조선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정묘호란, 후금에게 날개를 달아준 배금주의자들

인조반정에 성공한 서인은 반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괄을 역모로 몰아 제거하려 했다. 이를 눈치 챈 이괄은 먼저 반란을 일으켰는데, 한 때 한성까지 장악했던 반란군은 곧 진압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반란이 토벌된 뒤, 이괄의 잔당 중에 하나였던 한명윤의 아들들이 후금으로 달아났다. 이들이 한윤과 한택인데, 그들은 후금 홍타이지에게 조선의 상황을 알리고 출병을 권유했다.

안 그래도 조선이라는 배후가 신경 쓰였던 홍타이지는 군사기밀과 반정이라는 명분을 들고 온 이들을 반기지 않을 수 없었다. 곧, 광해군 폐위를 구실로 조선으로 진격했고, 10일만에 평양을 점령했다. 황주까지 내려온 후금군을 보고 인조는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을 갔다.

강화도에서 조선은 주전과 주화로 의견이 갈리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강화의 요청은 후금에서 먼저 보내왔다. 뜻밖의 요청에 조선에서도 주화론이 채택되어 강화조약을 맺게 되었다. 강화의 내용은 ‘형제로의 맹약, 철군과 함께 서로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 조선과 명과의 관계는 용인할 것’ 등이었다. 언뜻 보면 패전국이나 다름없는 조선에게 불리할 것이 없는 조약이고, 후금의 입장에서는 군대까지 동원했는데 너무 허무하게 물러간 것처럼 보였다. 명과의 관계를 끊으라고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금의 목적은 다른데 있었다. 어차피 조선을 멸망시킬 의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명과 대치하고 있는 와중에 조선과 오래 전쟁을 할 수도 없었다. 후금의 목적은 일단 교역의 확보에 있었다. 후금은 명과 전면전을 펼치면서 교역이 중단되어 물자의 부족으로 상당한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이를 조선을 통해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게다가 군대를 완전히 철수시키지도 않고 의주에 남겨두어 배후의 위협도 제거하였다. 비록 강화조약 위반이지만 승전국이라는 우월한 지위가 남아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조선이 광해군의 전략을 유지하여 전쟁의 명분을 주지 않고 적절하게 양측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방에 힘썼다면 후금은 말라죽을 수밖에 없었다. 척박한 만주땅에서 고립된다면 반드시 물자확보를 위해 이탈하는 부족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면 조선이든, 명이든 어느 쪽으로라도 무리수를 쓸 수밖에 없을 것이고, 어느 쪽으로 공격하든 배후가 노출되어 자멸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배금주의자들(서인)은 대책 없이 구데타를 일으켜 국방을 허술하게 함으로써 침략의 구실을 주고 말았다. 그리고 조선을 통해 물자를 구할 수 있었던 후금은 다시 명과 교전할 힘을 기를 수 있었다. 결국 맹목적으로 명을 추종하는 서인이 명의 멸망을 재촉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삼전도의 치욕

후금의 홍타이지는 중원을 정벌하기 위해 힘을 기르고 있었다. 조선이라는 교역지를 통해 군수물자를 확보하는 한편, 내몽골을 평정하여 북방영토를 하나로 모았다. 그리고 만주와 몽골의 부족장들에게 존호를 올리게 하여 황제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조선에 대해서도 기존의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하는 한 편, 명나라 정벌을 위한 식량지원과 병선의 제공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후금의 이런 무리한 요구에 조선에서는 다시 척화론이 대두하였고, 1636년(인조 14년)에 인조는 전국 8도에 선전교서를 내려 적의를 분명히 했다. 이에 대해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 원정군을 준비했다. 이 해가 바로 병자년으로 조선과 청 사이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드디어 겨울인 12월을 맞아 전쟁 준비를 끝마친 12만의 청군이 밀려 내려왔다. 하지만 앞서 각 도에 임금이 친히 선전교서를 내렸듯이 조선도 대비를 하고 있었다. 조선의 방위전략은 주요 거점에 (산)성을 쌓아 군대를 주둔시켜 진격하는 적을 포위하는 것이다. 하나의 (산)성이 공격당하면 다른 (산)성에서 지원을 하는 식이고, 만약 적이 점령을 포기하고 지나치면 보급로가 끊겨 고립되어 버린다. 이 (산)성들이 북쪽을 향하고 있어 임진왜란 때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장기전이 되면서 왜군도 고립되어 지리멸렬한 예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은 청군을 맞아서는 아마 싸울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의주부윤으로 있었던 명장 임경업은 백마산성을 굳게 지키고 청군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이런 전략을 청군도 물론 알고 있었다. 청군은 주변의 성을 그냥 둔채 우수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한성까지 바로 진격했다. 적을 포위하여 고립시켜야하는데 청군의 이런 비상식적인 진격에 미처 인조가 피신하지 못하고 거꾸로 청군에게 포위되어 버린 것이다. 인조와 세자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다 청군에게 발목이 잡혔고, 근처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할 수밖에 없었다. 고립된 남한산성에는 겨우 50일분의 식량만을 둔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적군을 고립시켜 싸우는 조선의 방위 전략은 무용지물이었다. 거꾸로 고립된 남한산성은 50일이 채 되지 않아 추위와 배고픔으로 견딜 수없는 지경이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강화도까지 함락되어 미리 가있던 왕자를 비롯한 왕실가족이 모두 포로가 되었다. 이에 최명길 등 주화파는 항복할 수 없는 상황을 설득하여 교섭에 나섰다. 당시 남한산성에는 김상헌 등이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김상헌은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보고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는데, 최명길은 눈물로 문서를 주워 붙이면서 “나라를 위해서는 찢는 사람이 없어서도 안되고, 붙이는 사람이 없어서도 안됩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항복을 결정한 인조는 삼전도(송파)에서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세 번 무릎꿇고 아홉 번 절하는 것)의 예로 청태종(홍타이지)를 맞았다. 임금이 바닥에 머리를 아홉 번 찧어야 했던 이 날을 조선의 사대부들은 삼전도의 치욕이라고 불렀다.




청의 식량기지가 되어버린 조선

조선은 명목 상 청의 제후국이 되었다. 명의 연호 대신 청의 연호를 사용하여 황제국으로 섬기게 된 것이다. 거기에 더해 명과의 모든 교통을 끊어야했으며, 명과의 전쟁에 원군을 보내야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 담보로 소현세자와 차자인 봉림대군이 인질이 되었으며 수많은 척화대신들이 함께 끌려가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청은 조선에 막대한 양의 조공을 요구했다. 매년 황금 100냥, 백은 1000냥을 비롯한 20여종을 조공으로 요구했는데, 물론 이 막대한 요구를 심양에 있던 소현세자가 잘 로비하여 걸러내기는 했지만 조선으로서는 굉장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반대로 청은 조선으로부터 오는 조공과 교역을 통해 상당한 물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척박한 만주에서 가장 곤란한 것이 식량이었는데, 조선을 통해 상당수 확보할 수 있다 보니 향후 다가올 명과의 결전에 만반의 대비를 할 수가 있었다. 조선이라는 배후의 위협을 제거한 것에 더해 그것을 후방기지로 활용할 수 있으니 이제 청의 중원 접수는 시간 문제였다.

결국 조선이 항복하고 7년이 지난 1644년, 청군은 북경에 입성했다. 이 전쟁에 함께 동참했던 소현세자는 명이 얼마나 썩어 들어갔었는지, 그리고 청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사실 명은 청군에 의해 함락되기 전에 이미 내부 반란으로 황제가 죽은 뒤였다. 반란을 일으키고 황제를 죽인 이자성은 청군의 진격에 북경을 버리고 도망을 쳤고, 청군을 막을 수 있던 유일한 장수였던 오삼계는 이자성의 난으로 황제가 죽자 청군에 투항하고 이자성을 쫓았다. 오삼계는 지금의 운남지방에서 번왕으로 임명되었지만, 훗날 강희제가 번을 없애고 만주족에 의한 중앙집권을 다지는 것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어 죽었다. 오삼계를 끝으로 중국에서 명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이라는 중화가 사라진 자리를 조선이라는 소(小)중화가 대신해야한다는 논리로 맹목적으로 청을 배척했다. 특히 정권을 잡은 서인은 북벌까지 주장하면서 강력한 반청의지를 나타냈는데 실제로 그것을 위한 준비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벌을 위한 효종의 군비증강을 저지하기까지 한다. 이들에게 북벌은 정권 유지를 위한 자신들의 명분일 뿐, 실제로 그럴 의지는 없었던 셈이다. 아니, 이미 소(小)중화가 되어버린 마당에 굳이 북벌을 단행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집권 서인은 중화를 잇는다는 강력한 명분을 바탕으로 장기 집권에 들어갔다.

이 소(小)중화라는 강력한 명분을 체계적으로 다져놓은 이가 바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子’자를 써 ‘송자’라고 불렸던 송시열이다. 물론 서인만 그렇게 불렀다. 남인은 ‘시열이’라고 부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