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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조선의 당(이원표)

(35호) ⑩ 대동법, 기나긴 투쟁의 승리

대동법, 기나긴 투쟁의 승리



조선의 세법

중국 수․당 시대에 확립된 조용조(租庸調)는 국내에 영향을 미쳐 고려시대 이후로 우리나라의 중요한 세법이었다. 조(租)는 토지에, 용(庸)은 사람에게, 조(調)는 가호에 부과되는 것인데, 조선시대에는 각각 전세, 군역(또는 신역), 공납이라는 이름으로 부과되었다.

전세는 토지에 대한 조세로 조선 초에는 토지의 상태에 따라 차등부과되었지만, 1결당 4두로 일원화되어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군역과 공납이었다. 특히 호별로 부과되는 공납은 그 폐단이 심각하여 공납 때문에 유랑하거나 노비가 되는 백성들이 많아 큰 사회문제가 되어 있었다.

공납이란 원래 지역의 특산물을 임금에게 바치는 것으로 백성들의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생긴 것이다. 그러던 것이 지역과 상관없이 공납물을 책정하여 백성들을 괴롭혔고, 상공(常貢), 별공(別貢) 등 수천가지의 공납을 시도때도없이 요구하였다. 그리고 갈수록 부담이 더해가는 공납의 폐단 중에 하이라이트는 바로 방납업자였다.

방납업자는 조선시대의 정경유착이라고 할 수 있다. ‘막을 방(防)’자를 쓰는 방납업자는 말 그대로 백성이 내는 공납을 방해하는 업자들이다. 공납을 받는 경아전의 관리들은 방납업자와 짜고 백성들이 가져오는 공납을 무조건 퇴짜를 놓았다. 그래서 방납업자에게 공납물품을 사도록 강요했고, 당연히 방납업자의 물건을 터무니없이 비쌌다. 울며 겨자 먹기로 백성들은 비싼 방납업자의 물건을 사야했고, 이렇게 얻은 폭리는 방납업자와 관리가 나눠 먹어 백성의 고혈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인조 원년에 이런 수탈 행위로 재산을 몰수당한 분호조참판 윤수겸의 축재액이 미곡 7만여석, 포 1만 5천필, 은 9천냥, 소 3백두라고 했으니 그 규모가 얼마나 어마어마했는지 알 수 있다.

공납의 또 다른 문제점은 부자나 빈자나 똑같이 낸다는 점이다. 전세는 토지소유자에게 부과되는 것이니 비록 누진적이지는 않아도 빈부의 차에 따라 규모가 결정된다. 하지만 공납은 호별로 부과되다보니 빈부의 구별없이 똑같이 내게 되어 있다. 이런 문제점들로 공납으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공납을 피해 유랑하는 백성들이 늘어나 군현자체가 사라지게 되는 일까지 발생하니 인조대가 되어서는 국가적인 문제로 다루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대동법의 등장

공납의 폐단을 해결하는 방안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납부하는 품목을 일원화하고, 부과 기준을 가호가 아닌 토지에 두면 된다. 이것이 바로 대동법이다. 하지만 당연히 방납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관리이면서 대토지소유자인 사대부들이 이를 용인할 리 없었다.

대동법은 선조대에 이이가 대공수미법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추진하였다. 사대부인 자신의 계급적 이해보다는 국가적인 이익에 충실할 줄 알았던 개혁정치가 이이의 이런 발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추종하는 서인에 의해 발목이 잡혔다. 동인, 서인을 막론하고 사대부들은 이이의 대공수미법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유독 서인은 이에 대해서 강렬히 반발했다.

그러던 것이 현실정치를 주장했던 남명 조식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북인이 정권을 잡았던 광해군대에 와서 경기도에 시범적으로 실시(1608년)되면서 물꼬가 트였고, 그 뒤 100년이 지나서야 대동법이 전국에 실시되었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 이처럼 오랜 기간의 투쟁을 통해 만들어진 법은 아마 없을 것이다.



대동법을 둘러싸고 분열하는 서인

앞서 이야기했듯이 대동법은 원래 이이가 주창한 것으로 그의 학통을 잇는 서인으로서는 당론으로 삼아야 마땅한 것이었다. 하지만 대토지소유자인 그들은 이이의 이런 개혁성을 철저히 외면했고, 오히려 대동법을 추진한 북인을 상대로 투쟁했다. 그래서 북인집권기에 시작된 대동법은 서인집권기가 되어서 중단되다시피 하였다.

하지만 서인 내부에 이이같은 정치인이 또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 김육이라는 이이에 버금가는 개혁정치가가 등장하여 대동법을 살려놓았다. 김육은 평생을 걸쳐 대동법을 위해서 살아온 정치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동법의 실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이었다.

김육은 조광조의 동지로 함께 죽임을 당한 김식의 5대손이다. 어릴 적부터 선조인 김식의 혁신적 이상정치를 동경했던 김육은 성균관 학생으로 있을 때부터 강직하기로 유명했다. 광해군 시절, 이언적, 이황 등의 오현을 성균관에 종사하자는 운동으로 그는 성균관에서 제명을 당했는데, 후에 제명이 취소되어도 그는 끝내 복귀하지 않았다. 그렇게 10년을 농촌에 파묻혀 살면서 농민들의 애환을 살폈던 김육은 인조가 즉위한 뒤에 관료의 길에 들어선 뒤 전생애를 농민생활 안정에 바친 개혁정치가가 되었다.

대동법은 광해군대에 경기도에 실시되어 인조 즉위년에 이원익 등의 주장에 힘입어 강원도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대토지소유자인 사대부들의 반발로 정작 실시되어야 할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실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김육은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대동법의 실시를 강력히 주장(1638)하였고, 김육을 중심으로 대동법을 추진하기 위한 당이 결성되어 한당(漢黨)이라고 불렸다. 한당에는 김육, 조익, 이시백, 신면 등이 참여했다. 반대로 끝까지 대동법의 실시를 저지했던 서인 주류들을 산당(山黨)이라고 했는데, 후에 노론벽파의 지주가 되는 송시열을 비롯해서, 김집, 송준길, 이유태, 김익희 등이 있다.



김육의 치열한 투쟁

효종이 즉위한 1649년, 김육은 대동법 시행을 위해 칼을 뽑아들었다. 70세의 노구로 우의정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김육은 30세의 젊은 왕에게 대동법을 충청도로 확대 실시하자고 소차를 올리면서 결단을 못 내린다면 자신을 벌해달라고 강경하게 말했다.

김육의 소차는 파란을 불러왔다. 역시 노신이었던 좌의정 조익이 뜻을 함께 했지만, 이조판서 김집을 중심으로 즉각 반대파가 형성되었다. 김집은 김장생의 아들로 학맥으로만 보면 이이의 직계에 해당하는 주류 중에 주류였다. 이조판서였던 김집은 자신의 제자들인 송시열, 송준길을 출사시켜 산당의 돌격대로 삼았다. 김육에 대한 송시열의 공격이 어찌나 심했던지 남인이었던 허적이 김육을 변호해주기까지 할 정도였다.

김육이 소수파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대동법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국왕들이 내심 대동법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해군, 인조 모두 즉위하자마자 대동법을 각각 경기도, 강원도에 실시하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대동법은 조세의 원천인 농민생활을 안정시키고, 사대부를 견제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효종 또한 즉위하자마자 김육을 앞세워 충청도 확대를 추진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리고 김육은 생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여 병든 몸을 이끌고 출사하여 다시 대동법 시행을 주장하면서 반드시 삼남(三南)에 실시해야한다고 했다. 김육의 이러한 치열한 투쟁 끝에 결국 효종 2년인 1651년에 충청도에 시행될 수 있었고, 1658년에는 전라도까지 확대되었다.

공납으로 인한 폐단의 심각성은 송시열 등의 산당도 물론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도 무조건 반대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송시열은 먼저 호패법을 강화하여 농민들의 유랑을 막자는 안을 내놓았다. 예나 지금이나 지배층은 민중의 요구를 들어주기보다는 보다 철저히 탄압하는 방안을 먼저 시행하는 것은 똑같은 법이다. 하지만 대동법과 공납을 비교했을 때, 백성의 입장에서나 국가적인 차원에서나 대동법이 월등히 우수한 제도임이 명백한 데 산당이라고 해서 계속 눈가리고 아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전라도까지 대동법이 확대되자 송시열은 대동법이 일부 대지주를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좋은 법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어쨌든 대동법은 서인의 지주인 율곡 이이에서 비롯된 것이니 말이다.



대동법, 근대화의 문턱

우리나라 역사상 하나의 법 또는 제도로서 대동법만큼 큰 영향을 미친 법이 없다. 대동법이 조선사회에 미친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공납으로 인한 농민 생활의 피폐를 시정하고자 시작된 법이지만 그것의 영향은 경제 전반과 심지어 신분제의 변화까지 몰고 왔다.

공납이 폐지됨에 따라 정부는 공납을 충당되었던 물품을 조달할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했다. 이로 인해 새로 생긴 직업이 공인(貢人)인데, 이들은 조선후기의 경제발전을 주도하게 되었다. 대동법 이후, 공인으로 지정되는 것은 큰 혜택이었다. 하지만 방납업자와는 다르게 정부에 양질의 물품을 납품해야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에 이를 위한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위해 공인들은 축적된 자본을 이용하여 수공업자들을 거느리기 시작했고, 선대제의 형태로 수공업을 육성하였다.

농민생활의 안정이 가져온 농업생산력의 향상과 수공업의 발전, 그리고 이것을 매개로하는 유통의 활발한 성장은 조선을 근대사회의 문턱까지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부유해진 경제력은 기존의 공고했던 신분제를 급격하게 해체하기 시작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이것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르지는 못했다. 신분제가 해체되면서 양반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는데, 이것이 완전한 신분제도의 해체로 이어지지 않고 단지 특권계층의 증가로만 나타나 조선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대동법으로 근대화의 문턱까지 갔던 조선은 이렇게 신분제도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또다시 정체를 겪게 되는 안타까움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