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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조선의 당(이원표)

(38호) ⑫ 파란만장한 숙종시대의 개막

파란만장한 숙종시대의 개막

 

조선에서 가장 정치적인 왕


기나긴 예송논쟁의 끝에서 남인의 손을 들어주었던 현종, 재위 15년동안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는 것이 자의대비의 복제를 3년(효종상)과 1년(효종비상)으로 정한 것이었다. 업적이라고 하기엔 좀 허무하지만 그것을 통해 왕실과 남인이 왕권을 다지는 기초를 만들었으니 마냥 무시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종은 기나긴 예송논쟁을 마치고 남인과 함께 뭐 좀 해볼 만 할 때, 느닷없이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만 13세의 어린 세자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숙종이다.

임금의 묘지문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가 쓰는 것이 관례였고, 당시에 그렇게 지목되는 이가 바로 송시열이었다. 아직 남인 정권이 탄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남인 유생 곽세건이 예송논쟁을 들어 송시열은 부당하다고 상소를 올렸다. 자의대비 복제에 관한 것이 현종의 가장 큰 업적인데 그것을 반대한 송시열이 묘지문을 제대로 쓸 수 있겠냐는 당연하지만 다소 치사한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남인 정권을 더욱 탄탄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의 스승을 공격하는 곽세건의 상소에 대해 서인들은 들불처럼 일어나 곽세건을 공격했다. 그런데 임금알기를 우습게 아는 이들에게 13세살의 꼬마 임금이 불효령을 내렸다. 현종과 송시열의 논쟁을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으며 현종의 행장을 적을 때는 반드시 ‘송시열이 예를 잘못 이끌었다’라고 쓰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행장을 적은 대제학 이단하는 “엄한 분부에 핍박받아 ‘오(誤)’자를 썼습니다”라고 상소하여 숙종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숙종은 “스승만 알고, 임금은 모르는구나”라며 이단하를 파면하는 등 단호한 조치를 취해 조정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

어린 임금의 당찬 모습을 본 남인은 자신감을 가지고 서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50년을 왕위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어리디 어린 임금이 자기편이라는 생각이 드니 구름 위를 다니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남인의 착각이었다. 숙종은 앞으로 세 차례나 환국(정권교체)를 단행하여 양당의 신하들이 임금 앞에 벌벌 기게 만든 당대 최고의 정치가였다.

 

 

권력은 결국 남인도 썩게 만들고

 

괜히 벌집을 건드린 서인은 결국 그 피해가 영수인 송시열에게까지 미쳤다. 남인들은 송시열을 죽이자고 덤볐다. 이에 서인은 필사적으로 스승을 구하기 위해 나섰고, 대사간 이지익은 “시열이 부덕한 군자지만 명색이 유학자인데 예를 가지고 죄를 얻는다면 그 마음이 승복하지 않을 것”이라며 한발 물러나 논쟁은 논쟁으로만 봐달라고 간청했다. 이런 가운데 남인 중에서 다소 이성적인 부류들이 나와 송시열의 처벌을 반대했다. 사실 송시열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괜히 이름만 몇 번 들어갔다 나왔다하다가 갑자기 벼랑으로 몰린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송시열을 죽이는데 반대했던 남인 인사들의 대표는 허적이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허적은 송시열이 효종을 폄하했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며 처벌을 반대했다. 사실 효종과 송시열은 북벌의 이상을 두고 군신관계를 뛰어넘은 정말 특별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송시열이 효종을 차자라 했던 것은 그야말로 이론적인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효종의 종통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상식선에서 송시열을 두둔했던 남인온건파는 영상 허적을 중심으로 민희, 김휘, 목래선, 심재, 민종도, 유명천 등이었고, 후에 탁남이라고 불렸다. 반대로 강경파는 허목과 윤휴를 중심으로 이무, 이수경, 남천한, 남천택, 권태재, 권해, 홍우원, 이봉징 등으로 청남이라고 불렸다.

이번에는 드물게 온건파인 탁남이 주도권을 쥐었다. 하늘이라도 찌를 듯 무서운 분노를 보였던 숙종인데, 갑자기 완급을 조절하여 송시열을 거제도 유배로 마무리하고 온건파인 탁남에게 정권을 준 것이다. 이에 청남의 영수인 허목은 같은 남인인 허적에게 칼을 돌렸는데, 숙종은 오히려 허목을 파직하고 허적을 대우했다.

송시열 문제 일단락되면서 허적의 위상은 임금과 맞먹을 정도로 높아졌다. 영의정이던 허적은 숙종 원년에 도체찰사부가 설치되자 도체찰사를 겸임하여 군수통제권도 갖게 되었다. 집권당인 탁남의 영수이자 내각의 수반(영의정)이고, 거기에 군수권까지 쥐게 된 허적의 권력은 임금도 불안을 느끼게 할 정도로 커졌다. 하지만 그 권력이 탁남을 썩어 들어가게 했다. 허적에게는 허견이라는 서자가 있는데 하는 짓이 망나니와 같아서 남의 재물을 뺏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는 남의 아내를 뺏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만인지상의 아들은 온갖 비행에도 처벌받지 않았고, 허적은 아들의 비행을 감추기 위해 압력까지 행사하였다.

 

 

남인의 몰락

 

숙종 6년에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잔치가 열렸다. 영상 허적이 임금으로부터 궤장(공이 많은 노신이 받는 궤와 지팡이)을 받은 것을 축하하는 잔치였는데 최고권력자의 잔치답게 8도의 문무백관이 다 모일 정도로 정말 뻐근하게 열렸다. 그런데 이 잔치가 남인 몰락의 서막이 되었다.

잔칫날, 비가 내리자 숙종은 궁중의 기름천막을 허적의 집에 갖다 주라고 하명했다. 그런데 하명을 받은 신하가 기름천막은 이미 허적이 가져갔다고 보고한 것이다. 왕실물건을 함부로 유용하는 허적의 행위에 숙종은 크게 분노했다. 그래서 잔치를 몰래 엿보게 하였는데, 그 신하가 돌아와 인산인해를 이룬 모습과 아들인 허견이 따로 무사와 장정을 모아 잔치를 벌이는 모습을 그대로 보고했다. 이에 숙종은 남인을 칠 명분이 생겼다고 판단하고 삼장신(三將臣, 총융사, 훈련대장, 포도대장)을 불러들였다. 무슨 일을 도모할 때, 문신이 아닌 무신을 부르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병권부터 단속하는 숙종의 판단은 주효했다. 이 자리에서 남인이었던 훈련대장 유혁연을 해임하고, 장인이며 서인인 김만기를 훈련대장에 임명했다. 이렇게 병권을 단속하고, 바로 삼정승과 이조, 예조판서와 도승지, 대사헌, 이조참판 등 주요 관직에 모두 서인을 앉혔다. 순식간에 일어난 정권교체에 남인은 멍하니 당할 수밖에 없었고, 허적은 6년만에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곤두박질쳤다. 이것이 경신환국(庚申換局)인데, 영원할 것 같았던 남인 권력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서인이 그 자리를 찾았다.

 

 

송시열에게 실망한 서인의 젊은이들

 

숙종은 허적을 죽이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그 아들인 허견이 역모에 연루되었다. 무사들을 모아 거느리고 있었던 데다가 인조의 손자이자 숙종과는 당숙뻘인 복선군을 추대하려고 했다는 정황증거까지 나온 것이다. 이로 인해 복선군은 교살되고, 그의 형 복창군도 사사되었으며, 허견을 비롯한 많은 남인들이 죽거나 처형되었다. 하지만 정작 허적을 죽일 명분이 없었다. 숙종은 연좌제를 적용하여 허적을 죽이려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서인 내부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래서 숙종은 관직을 삭탈하고, 서인으로 강등한 뒤에 의금부를 통해 허적 일가의 비리를 샅샅이 조사하게 했다. 결국 허견의 비행을 덮기 위해 압력을 행사한 사실이 드러나 허적도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6년동안 벼르던 서인은 남인 전체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청남의 영수인 윤휴가 복선군 형제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사사된 것이 대표적이다. 윤휴는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라며 탄식했다. 하지만 그도 송시열을 그토록 죽이려 안달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자업자득인 측면이 없지 않았다.

남인 몰살의 선두에 선 것이 바로 척신 김석주이다. 김석주는 숙종의 외조부인 김우명의 조카이고, 대동법을 세운 김육의 손자이기도 했다. 서인이었지만, 대동법으로 인해 송시열 등과 구원이 있어 처음에는 남인과 함께 행동하였지만, 남인집권기를 맞아 정권탈환의 돌격대 역할을 마다하지 않아 다시 송시열과 가까워졌다.

김석주는 측근인 김익훈, 김환 등을 이용하여 연속적으로 남인의 역모를 고변하게 했다. 대동법을 세운 조부 김육과 다르게 얄팍한 공작정치의 달인인 김석주는 역모를 꾸며내어 나머지 남인들도 죄다 죽음으로 몰고 가려 했던 것이다. 이일로 허새, 허영 형제가 고문에 못 이겨 거짓자백을 하고, 이덕주는 끝까지 부인하면서 맞아 죽었다. 하지만 국문이 계속될수록 모순되는 증언이 반복되고 서인 내부에서도 의심이 번져, 결국 역모는 김익훈의 무고로 마무리되었다. 무수하게 억울한 죽음만을 남겨둔 어처구니없는 결과였다. 하지만 역모에 대한 무고는 사형이라는 전례와 다르게 김익훈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그 하수인으로 실제 고변을 담당했던 김환이라는 자만 유배형을 받았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젊은 서인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승정원과 사헌부의 젊은 서인들은 선배들의 이런 모략에 치를 떨었고, 지평 박태유와 유득일 등은 김익훈을 유배보내라고 상소를 올렸다가 거꾸로 외직으로 발령받는 보복성 인사를 당하기도 했다. 이런 조치에 조정이 들끓었고, 서인은 노장파와 소장파로 갈려 김익훈의 처벌문제를 두고 으르렁댔다.

숙종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서인의 영수급 인물들을 끌어들여야한다고 판단했다. 당시 국가원로로 대접받던 인물은 세 명이 있었는데, 송시열과 윤증, 박세채가 그들이다. 특히 송시열은 서인 모두가 ‘대로(大老)’라는 존칭으로 부를 만큼 존경을 받고 있었고, 관직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국왕과 중신 모두 국가의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는 회덕에 있는 그에게 직접 의견을 물어 처리하는 관행이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었다. 이런 송시열이 숙종의 부름을 받아 조정에 나온다고 하니 젊은 서인들은 온통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흠결하나 없이 강직한 성품인 그가 조정에 나오면 반드시 이 일을 원칙적으로 처리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송시열은 조정에 나와 엉뚱하게도 태조 이성계의 시호를 추증하거나 효종의 위패를 영원히 모실 세실을 만들자는 등의 제안을 했다. 대로의 말씀이니 어느덧 조정은 그것의 가부에 대한 논쟁으로 바뀌었고, 김익훈 문제는 송시열이 “익훈의 조부인 김장생은 저의 스승인데, 제가 익훈을 잘못 인도했습니다. 그러니 잘못은 저에게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덮어버렸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그 이상으로 커지는 법이다. 인조대부터 4명의 왕을 모시고, 효종과 현종의 스승이면서 서인의 이념적 토대였던 대로의 이런 처사에 젊은 서인들은 싸늘하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 이 일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