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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조선의 당(이원표)

(39호) ⑬ 남인의 마지막 반격과 장희빈

남인의 마지막 반격과 장희빈

 

서인의 분열

 

경신환국으로 권력에서 쫓겨난 남인은 역모에 몰려 부당한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서인 중에서 상식적인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무고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 사태에 대해 젊은 서인들이 분노했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숙종은 서인의 원로대신을 불러들였다. 그렇게 지목된 이들이 송시열과 박세채, 윤증이었다. 송시열은 출사하자마자 무고사건을 덮어버려 젊은 서인들의 기대를 저버렸고, 박세채는 출사는 했지만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그리고 윤증은 과천에 머물면서 서울로 올라오지 않으면서 관망하고 있었다.

이에 박세채가 윤증을 찾아가 출사하여 함께 바로잡을 것을 요청했는데, 여기서 윤증은 세 가지 조건을 들었다. 첫째는 ‘남인과 화평할 수 있겠는가’, 둘째는 ‘김석주 등 외척세력을 제거할 수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파에 관계없이 고루 등용할 수 있는가’였다. 자신과 박세채가 출사하여 힘을 합하면 이 세 가지를 달성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는데, 박세채는 크게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박세채는 윤증의 조건이 모두 타당한 것이며 현재의 정국을 바로잡기 위한 길임을 인정했지만, 힘이 없었다. 송시열이 주도하고 있는 조정에서 박세채와 윤증의 힘만으로 이것을 달성하긴 힘들었다. 윤증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박세채는 임금에게 현안에 대한 입장만을 전달하고 관직을 내놓았다.

송시열에게 실망한 서인들은 윤증의 이러한 처신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송시열과 윤증의 이런 시대관은 향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서인의 국혼물실(國婚勿失)과 장옥정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은 정국 운영에 두 가지 방침이 세웠다. 국혼물실(國婚勿失)과 숭용산림(崇用山林)이다. 산림(山林)이란 재야의 높은 선비를 칭하는 것으로 당파를 떠나 이들을 우대하여 기용하겠다는 것이다. 처음 영의정으로 추대된 남인의 이원익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두 차례의 예송논쟁을 통해 숭용산림(崇用山林)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하지만 당쟁의 마지막까지도 꿋꿋하게 남는 것이 국혼물실(國婚勿失)인데, 이것은 왕비는 서인가문에서만 나와야한다는 것이다.

숙종에게는 일찍 죽은 인경왕후 김씨와 유명한 인현왕후 민씨가 있었는데, 모두 서인 실세인 김만기와 민유중의 딸이었다. 그리고 앞서 윤증이 제거해야한다는 외척가이기도 했다. 인현왕후는 여러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지혜롭고, 인자한 왕비로 많이 그려졌는데, 실제 그녀가 어땠는지와 관계없이 인현왕후의 존재는 서인의 정국운영에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또, 그의 친정인 민정중, 민유중 일가는 당대를 대표하는 세도가이기도 했다.

국혼물실의 배경에는 당연히 세자의 존재가 있다. 후에 왕이 될 세자의 외가가 되어야지만 정국운영에 불안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과의 결혼은 힘으로 할 수 있지만, 아들을 낳게 하는 것까지 권력으로 할 수는 없었다. 일찍 죽은 인경왕후는 딸만 셋을 낳았고, 그 딸들도 모두 일찍 죽었다. 그리고 인현왕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숙종은 아들을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지 10년이 지나도록 왕비의 몸에서 소식이 없었다.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간 곳이 바로 장옥정이다. 장옥정은 중인 출신인 역관 집안의 딸로 조선에서 유일하게 궁녀에서 왕비까지 된 입지적인 인물이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왕비에게서 마음이 멀어진 숙종은 장옥정을 후궁으로 올려 가까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소한 숙종의 변덕이 아니었다. 국혼물실의 원칙 아래에서 왕비는 곧 서인이었다. 경신환국 이래 서인정권도 6년 가까이 흘렀고, 숙종은 남인 때와 같이 이를 견제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때문에 자연히 인현왕후에게서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서인은 초조했다. 남인정권도 6년만에 몰락했는데, 숙종이 왕비를 대하는 태도가 바로 자신들에게 대하는 태도로 보였기 때문이다. 왕비의 몸에서 세자라도 나왔어야하는데, 그도 아닌 상태에서 숙종의 마음이 떠나고 있었다. 이런 초조함은 서인으로 하여금 무리수를 두게 했다.

서인이 장옥정을 경계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장옥정의 당숙인 장현이 허견의 옥사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허견은 남인 영수인 허적의 아들로 그의 사건은 경신환국의 빌미가 되었다. 장옥정이 남인과 관계가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서인이 장옥정을 남인으로 몰아가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장옥정과 남인은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서인은 장옥정을 추방하라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자칫 그녀가 왕자라도 낳게 되면 위기에 몰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숙종은 단호했다. 상소를 올린 이징명 등을 파직하고, 오히려 장옥정을 숙원으로 올렸다. 그리고 서인의 안 좋은 예상은 바로 적중하여 숙종 14년에 장옥정은 왕자를 낳는다.

서인의 무리수는 여기서 등장한다. 장옥정의 모친이 산후조리를 위해 가마를 타고 궁에 들어가다가 사헌부에 의해 제지당하고 가마를 뺐기는 모욕을 당한 것이다. 그녀가 천출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숙종은 분노했다. 이것은 분명 새로 탄생한 왕자에 대한 서인의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천출의 외할머니와 중인 출신의 어머니를 둔 왕자, 이것이 서인의 시선이었다. 숙종은 14년만에 얻은 아들을 보호하기로 결심하고, 서인과 전쟁을 선포한다.

숙종은 왕자가 백일도 안 되었을 때, 시․원임대신과 육조 및 삼사 책임자들을 모두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숙종은 왕자를 원자(元子, 임금의 맏아들)로 삼아 명호(名號)를 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사대부의 집안에서는 장자가 가통을 잇고, 왕가에서는 원자가 왕통을 잇는다. 즉, 숙종은 왕자를 세자로 둘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당연히 서인은 버텼지만, 숙종은 한 번 입 밖에 낸 말을 철회한 적이 없었다. 반대하는 신하들을 모두 파직하고 예조에 원자의 명호를 정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장옥정은 희빈으로 올랐다.

장희빈과 원자를 두고 발생한 숙종과 서인의 갈등은 남인으로서는 재기의 발판이었다. 남인들은 빠르게 장희빈의 오라비인 장희재에게 줄을 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8년만에 서인과 남인의 리턴매치가 시작되었다.

 

 

기사환국(己巳換局), 송시열의 죽음과 서인의 몰락

 

원자 정호 문제를 두고 숙종의 완강함에 모두 침묵할 수밖에 없었지만 한 사람만은 왕명에 개의치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송시열이다. 그는 이미 종묘에 까지 고한 원자정호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송시열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임금을 제일사대부로 여기고 있는 그에게 정부는 사대부의 집단권력이었고, 아무리 왕이라 해도 사대부 전체의 뜻을 어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대부의 뜻이 바로 자신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조선이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라고 해도 왕조국가였다. 신하들이 버텨도 최종 결정은 어쨌든 왕이 하는 것이었다. 왕이 연산군과 광해군과 같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얼마든지 자기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다.

숙종은 14년만에 얻은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집권당을 바꿔야한다고 생각했다. 숙종은 원자정호가 잘못되었다는 송시열의 상소에 대하여 승지 이현기와 사헌부 교찬 이익수를 불러 물었다. 이현기는 남인이고, 이익수는 서인인데 당연히 이익수는 송시열을 옹호한 반면 이현기는 송시열이 틀렸다고 답했다. 이익수는 장희빈 모친을 가마에서 끌어낸 바로 당사자이기도 했다. 숙종은 다시 남인을 택했다. 이익수를 파직하는 한편, 송시열은 삭탈관직 했으며 송시열의 처분에 대해서는 발언하지 말 것과 상소도 받지 말라고 명했다.

숙종은 송시열의 상소에 대한 자신의 대처에 원자의 미래가 걸려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서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장차 왕이 될 지도 모르는 원자는 자신의 암울한 미래였다. 돌도 안 된 아기를 두고 국왕과 서인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꼴인데 이 아기가 훗날 경종이다. 경종의 불운한 운명은 이미 이 때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다.

숙종은 원자 정호에 반대한 영의정 김수흥 등을 파직하고, 남인인 목래선, 김덕원을 각각 좌의정과 우의정에 임명했다. 그리고 대사간, 지평 등 주요직도 모두 남인으로 교체했다. 이것이 바로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10년만에 다시 정권을 잡은 것이다.

정권을 잡은 남인의 복수는 일단 송시열에게 집중되었다. 대사헌 목창명은 송시열을 국문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여든 두 살의 송시열이 남인 위관 앞에서 국문을 받고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그건 숙종으로서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숙종은 일단 송시열을 제주도에 유배 보냈는데 남인은 계속 송시열을 죽이고자 국문을 주장했다. 서인의 원로가 국문에서 장렬하게 죽으면 서인에게 명분을 줄 뿐인데도 남인은 숙종만큼의 정세파악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국문현장에서 당당하게 뜻을 주장하면서 고문 받아 죽는 것은 아마 송시열도 원하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서인들은 모든 것을 걸고 반정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숙종은 송시열을 불러들이기 싫었지만 남인의 요구에 어쩔 수없이 송시열을 국청으로 불렀다. 하지만 숙종은 송시열이 진술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숙종이 사약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효종과 현종, 두 임금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은 길에서 죽었다. 영의정이었던 김수항도 함께 그의 귀양지에서 사사되었다. 10년 전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과 윤휴가 사약을 마셨던 것처럼 이제 정권교체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시대가 되었다.

경신환국의 공신록은 이제 살생부가 되었다. 18명이 사사되거나, 장사, 교수형, 참형 등의 방법으로 죽었고, 59명이 유배, 26명이 삭탈관직 당했다. 송시열과 친하다고 하여 유배된 이이명같은 이들도 있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단지 김익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유배된 김만채와 같은 이들도 있었다. 적어도 예송논쟁 때는 양당이 체계적인 사상과 이론에 근거하여 서로를 공격했는데, 두 차례의 환국은 정말 저열하기 짝이 없었다.

 

 

쫓겨나는 인현왕후

 

원자를 위한 숙종의 마지막 계획은 장희빈을 왕비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면 자연히 원자는 서자가 아닌 적자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비를 바꾸는 것은 남인도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당파싸움에 혈안이 되었어도 국모(國母)의 자리가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최소한의 양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숙종은 역시 단호했다. 송시열 사사라는 남인이 그토록 원하던 사탕을 주고 폐비에 대해 침묵하게 만든 것이다. 당연히 서인은 폐비에 반대하다가 또 대거 귀양을 가야했다.

명문가의 딸로 태어나 화려하게 왕비에 오른 인현왕후는 서인(庶人)이 되어 쫓겨났다. 그리고 장희빈이 왕비에 올랐다. 역관 집안의 딸에서 국모의 지위까지 오르는 최고의 순간인 것이다. 하지만 장희빈의 영예는 그리 길지 않았다. 숙종의 후궁 중에서 또 다른 아들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번엔 장희빈처럼 중인 집안의 여식도 아니고 진짜 천출인 무수리의 아들이었다. 그가 바로 훗날 영조인 연잉군인데, 숙종의 지독한 아들사랑은 연잉군에게도 이어져 그것이 장희빈과 남인정권을 위협했다. 파란만장한 숙종시대는 아직도 끝이 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