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재/조선의 당(이원표)

(40호) ⑭ 무소불위의 숙종시대

무소불위의 숙종시대

 

왕비를 바꾸자는 게 역모?

 

남인 집권기로 시작하여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였다가 다시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는 동안 수백명의 사대부들이 죽거나 다쳤다. 서인의 거두 송시열도 이 와중에 죽었고, 윤휴, 허목 등 남인의 기둥도 쓰러졌다. 보통 조선을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라고 부르지만 숙종만은 양당의 갈등을 이용하여 강력한 절대왕권을 휘둘렀다. 당시 집권 남인이나 야당인 서인 모두 임금의 눈치를 보느냐 여념이 없었고, 어떻게든 임금의 마음을 돌려 권력에 다가서는 데에만 힘썼다. 집권이 정의인 시대이고 실권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제로섬 정치에서 유일한 주권자인 임금만이 모든 것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반정을 통해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예에서처럼 이전의 사대부들은 언제든 왕조차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명종이 후사가 없었을 때에는 유성룡 등 사대부들이 직접 종친들을 방문해서 임금감을 찾기도 했다. 그렇게 사대부들의 면접을 거쳐 왕으로 채택된 이가 바로 선조였다. 하지만 숙종시대의 사대부들은 감히 임금을 어떻게 해볼 요량을 펼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나마 숙종 초인 경신환국은 집권당인 남인이 다른 종친을 내세워 역모를 꾀한다는 서인의 고변으로 이뤄졌지만 그 뒤로는 음모조차도 임금의 지위를 가지고 만들어지지 못했다. 상대당이 임금을 바꾸려고 한다는 말조차도 이제 입 밖에 꺼내지 못할 정도로 숙종의 권위가 강력해진 것이다.

장희빈이 왕비가 된 남인집권기에 하나의 역모가 고발되었다. 서인 김석주의 가인(家人)이었던 함이완이 같은 서인이었던 한중혁, 김춘택, 유복기, 유태기 등이 역모를 꾸민다고 고발한 것이다. 김춘택은 숙종의 전 장인인 김만기의 손자로 숙종의 처조카뻘이었는데 공작정치에 아주 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궁녀의 동생을 첩으로 삼아 궁 안의 정보를 캐내고, 장희재의 처와 간통하여 고급정보를 빼내는 등 첩보활동에 철저히 하였는데, 이것이 남인의 레이다에 걸린 것이다. 하지만 김춘택이 도모하려던 것은 임금이 아니라 장희빈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민비복위를 위해 뛴 것에 불과하였다. 역모라고 하기에는 스케일이 너무 작은 이 사건을 역모라는 이름으로 집권당인 남인이 고발한 것이다. 김춘택 등이 정보를 수집하면서 사람도 모으고 했으니 어떻게 보면 과거처럼 잘 꾸며서 진짜 역모로 둔갑시키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인데 집권당인 남인조차도 감히 숙종의 지위를 이용해서 뭔가를 꾸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것이다. 그냥 사실 그대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간이 작아져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역모라는 이름으로 국문이 시작되었다. 공포에 휩싸인 서인은 궁여지책으로 숙종이 총애하는 다른 후궁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바로 숙원 최씨로 최근 드라마에서 동이로 알려진 여인이었다. 그나마 장희빈은 서녀(庶女)이긴 해도 중인가문의 여인이지만 최숙원은 그야말로 오리지널 천민 출신이었다. 사대부로서의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서인이 천민출신 여인의 치맛자락을 잡는다는 게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당시 서인으로서는 대안이 없었다. 최숙원,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아들 연잉군만이 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서인도 역모를 고발했다. 이번 역모는 장희빈의 오라비이며 남인정권의 핵심인 장희재가 최숙원을 독살하려고 했다는 내용이다. 역모치고는 스케일이 너무 작은 고발이지만 이것이 촉매가 되어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갑술환국

 

서인의 고발은 고발자인 김인 등 세 사람만 옥에 갇히고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함이완을 이용한 남인의 고발은 서인을 도륙내고 있었다. 남인 세상이 굳어지는 것처럼 보였는데 느닷없이 숙종이 “임금을 우롱하고 대신을 함부로 죽이는 정상이 통탄스럽다. 국청에 참여했던 대신들을 모두 삭탈관직 문외출송하고 민암과 금부당상을 외딴 섬에 안치하라.”는 명을 내렸다. 당시 우의정이던 민암은 남인정권의 중추였고, 금부당상은 지금으로 치면 검찰 수뇌부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최숙원 독살미수 사건은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채 실체를 알 수 없는 민비복위운동에 대해서만 국문을 실시하면서 대신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것이 숙종의 명분이었다. 여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최숙원이었다. 숙종의 총애를 받고 난 뒤로 왕비인 장희빈의 끔직한 견제를 받아야했던 최숙원은 자신에 대한 독살 미수 사건을 사실이라고 말하는 한 편, 적극적으로 민비를 옹호했다. 가문이라는 배경이 전혀 없는 최숙원은 자신과 자신의 아들이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권력의 비호가 필요했고, 그것이 대안이 필요한 서인과 이해가 맞아 이들 사이에 동맹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하루아침에 조정에서 남인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서인이 자리를 잡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숙종에 의한 전격적인 정권교체였다. 이것이 바로 갑술환국(1694)이다. 모든 일은 한밤중에 일어났다. 새벽 두시에 숙종은 남인대신을 모두 몰아내고, 그 전과 마찬가지로 병조판서에 서문중, 훈련대장에 신여철을 임명하여 병권을 먼저 서인에게 옮긴 뒤에 바로 영의정 남구만, 이조판서 유상운, 승지에 김두명 등 주요직을 서인으로 임명했다. 다음날이 되어서는 대사헌에 이규령, 우찬성에 박세채, 공조판서에 신익상 등을 임명하여 조정을 서인 일색으로 만들었다. 남인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하룻밤사이에 축출된 셈이었다.

갑술환국으로 남인은 14명이 사형당하고 67명이 유배, 삭탈관직 등 형벌을 받은 이가 54명이나 되었다. 특이한 것은 독살설을 제기했던 김인도 함께 사형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김인의 고발에 대한 국문을 진행하자 어긋나는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의정 남구만은 사건의 마무리를 요청했고, 독살설이 서인들의 공작임을 눈치 챈 숙종도 무고한 희생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고발자인 김인까지 죽여 사건을 마무리한 것이다.

다시 서인의 세상이 되었고, 남인은 재기할 힘을 잃었다. 하지만 서인은 남인만을 제거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았다. 장희빈과 세자가 그대로 있는 한 자신들의 위치는 여전히 사상누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인의 분열

 

집권 서인의 칼은 왕비의 자리에 있는 장희빈에게 향했다. 이미 권력의 배경이던 남인이 축출된 마당에 장희빈이 기댈 곳은 오라비인 장희재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선 서인은 장희재부터 공격했다. 포도대장이던 장희재는 권력을 사사로이 이용했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국모를 모해했다는 혐의로 국문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여기서 국모는 당시 왕비인 장희빈이 아니고 폐비된 인현왕후였다. 장희재가 장희빈에게 보낸 편지에 “폐비 민씨가 은화를 모아 복위를 도모하고 있습니다.”라는 글귀가 있었는데 이게 국모를 모해한 것이라는 것이다. 폐비에 대한 일을 논의한 것이 국모 모해라고 지적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인현왕후의 복위는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다. 반대로 장희빈에 대한 폐비는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국문장에서 장희재를 구한 것은 서인인 영의정 남구만이었다. 남구만은 ‘세자의 외삼촌’이라는 이유를 들어 구원을 청했고 숙종도 세자를 생각하여 국문을 멈췄다. 그리고 이 일을 두고 서인은 둘로 쪼개졌다. 정확하게는 세자에 대한 입장을 두고 나뉜 것이고 기원을 따지면 경신환국 뒤의 정국운영을 두고 송시열과 윤증의 논쟁이 분열의 시작이었다. 당시 윤증은 출사의 3조건을 내세우면서 남인과의 화친을 주장하였는데 이에 동조했던 서인 일부가 남구만을 중심으로 모인 것이다. 그리고 집권기에 남인정권이 밀던 세자를 보호하여 자연스럽게 화합의 정치를 도모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서인 강경파가 이를 가만히 둘리 없었다. 그들은 이들 온건파까지 탄핵하면서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렇게 서인은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분열했다.

아쉽게도 정국은 노론의 주도로 움직였다. 여기에는 역시 숙종의 몫이 컸다. 세자와 연잉군 모두를 보호하고 싶었던 숙종은 교묘한 선택을 하는데 연잉군을 후계자로 미는 노론에게 힘을 실으면서 세자의 지위는 그대로 둔 것이다. 세자가 왕이 되어도 노론이 집권하고 있으면 연잉군에게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상황이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노론은 집중적으로 장희빈을 공격했다. 장희빈은 왕비에서 빈으로 다시 강등되었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었는데도 장희빈을 죽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결국 인현왕후가 병으로 죽자 그것을 장희빈의 저주로 몰아 숙종의 분노를 자극하는데 성공했고, 장희빈은 사약을 받게 되었다. 세자는 눈물로 대신들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소론인 영의정 최석정은 함께 울며 목숨을 다해 지키겠다고 한 반면 노론인 좌의정 이세백은 매정하게 돌아서 버렸다.

성종 때 폐비 윤씨가 사약을 마신 뒤 두 번째로 왕비가 사사된 것이었다. 그리고 폐비 윤씨의 사사가 연산군이라는 결과를 낳았듯이 장희빈이 사사된 마당에 세자가 즉위하는 것은 노론으로서 최악의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숙종도 장희빈을 죽임으로써 노론과 같은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고 점점 세자가 연산군처럼 될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마 소론이 없었다면 경종은 즉위하지 못하고 폐세자되어 죽음을 맞았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폐세자는 폐비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이것을 위해 숙종과 노론의 거두 이이명이 밀담을 나눴다. 이른바 정유독대(1717)인데 임금과 신하간의 독대는 당시 조선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반드시 승지와 사관을 대동하여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나눠야하는 것이 조선의 법이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상신(相臣: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사사로운 사람으로 삼을 수 있으며, 상신 역시 어찌 임금의 사사로운 신하가 될 수 있습니까?” 라는 영중추부사 윤지완의 상소가 이 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임금의 모든 발언을 기록하고 공개하는 조선의 이 제도는 현대 정치에도 없는 가장 민주적인 제도 중에 하나였다.

정유독대 후 숙종은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한다. 여느 때 같으면 반대해야할 노론은 침묵했다. 이것이 밀담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숙종과 노론은 폐세자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세자를 정계의 한복판에 던진 것이다. 단 하나의 실수가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소론은 필사적으로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던졌고, 노론은 폐세자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하지만 3년도 안되어 숙종이 만5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파란만장한 숙종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무소불위의 숙종 대신 소론 왕인 경종이 즉위하였는데, 이는 흡사 여소야대와 같은 형국이었다. 그러나 왕조국가인 조선에서 더군다나 숙종이라는 왕을 경험한 노론으로서는 경종의 존재는 그 자체로 위기였다. 남인이 재야로 밀려난 조정에 이제 서인이 분열한 노론과 소론이 정국을 다투며 당쟁을 밑바닥까지 밀고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