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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조선의 당(이원표)

(37호) ⑪ 제로섬 정치의 시작

제로섬 정치의 시작


율우의 문묘종사

문묘는 공자를 받드는 사당으로 문묘종사라는 것은 공자에게 제사를 지낼 때 함께 배향하는 것을 말한다. 문묘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해서 그의 학통을 잇는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사성을 배향하고, 그 뒤에 공자의 수제자인 공문십철과 송조(宋朝) 육현(주자 등)이 좌우로 배향된다. 따라서 유교 특히 주자학의 나라인 조선에서 공자에서 주자까지 이어지는 문묘에 함께 종사된다는 것은 그의 학문과 사상이 조선의 국시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을 처음 정치적으로 활용한 것이 사림파인데 조광조는 사림파의 지주인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종사를 주장하여 자신들의 이념적인 우위를 확실히 하고자 했다. 사림파는 정몽주로부터 시작하여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 등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가지고 있고, 김굉필의 제자인 조광조가 중앙정계에 진출하였을 때부터 비로소 실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훈구파가 사림파의 이런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다만 이념적인 우위가 분명한 사림파를 학문적인 논쟁으로 이길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정몽주와 김굉필을 분리하여 정몽주만을 문묘에 올렸다.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만은 문묘에 올릴 수 없다는 훈구파의 의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여러 차례의 사화를 통해 사림파는 많은 탄압을 받아야했다.

사림파가 집권한 후, 문묘종사운동은 김굉필을 비롯하여 정여창, 이언적, 조광조에 더해 이황까지 확대되었다.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이미 사림이 집권한 후였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고, 광해군대에 와서 5현의 문묘종사가 이뤄졌다.

문제는 인조반정 이후였다. 당쟁 초기에 이황은 당파의 인물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이때쯤에는 남인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있었다. 반대로 서인의 지주였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은 문묘에 올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집권 서인은 이 둘의 문묘종사를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둘의 호를 따서 ‘율우의 문묘종사’라고 불렸다. 하지만 5현의 문묘종사 때는 사림 전체가 뜻을 함께 했지만, 율우의 문묘종사는 야당이면서 집권의 파트너이기도 한 남인이 반대하여 쉽게 성사되지 못했다.

남인의 입장에서는 집권당인 서인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학문적인 우위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이도 이황만큼 인정받는 대성현인데 명분 없이 반대만을 일삼는 남인에게 정당성이 있을 리 없었다. 자신의 스승인 이황만을 공자 밑에 두고 싶었던 남인의 이런 얄팍한 수는 그동안 어느 정도 공존을 유지하며 정국을 이끌었던 정치관계를 파탄 내었다. 남인의 이이에 대한 지나친 비난이 도를 넘어선 것이다.


문묘배향도 공자를 중심으로 가운데 사성과 공문십철(공자의 제자), 그 밑에 주자 등 송조육현이 있다. 그리고 양쪽으로 우리나라의 18명의 유학자(아국18현)이 있다. 후에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 노론의 영수들도 문묘에 배향되었다. 


율곡은 중이고, 우계는 도망자

남인이 율우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이유는 참으로 치졸했다. 이이는 절에 들어갔던 전력이 있고, 성혼은 임진왜란 때 임금을 버리고 도망했다는 것이다.

율곡 이이가 잠깐 절에 들어갔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16세 때,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죽었는데 크게 슬퍼한 이이는 3년간의 여묘살이 후에 인간의 죽음에 대해 고뇌하면서 금강산의 한 절에서 1년간 불교를 공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이의 사상이 불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남인의 주장은 지나친 것이었다. 대유학자로서 이이의 업적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인데 어린 시절 겪었던 한때의 학문적인 방황을 두고 그가 이룬 평생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유학 이외의 다양한 학문을 접하는 것을 터부시하지 않았던 이이의 사고는 오히려 유학을 더욱 풍부히 한 측면이 있다. 당시 대세를 이루던 주자학은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이는 이황에 의해 집대성이 되었는데, 이이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면 유학을 한층 더 풍부하게 성장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이이 이후의 조선의 유학은 폭넓은 담론을 형성하여 주자학의 측면에서는 이미 학문으로서 정체한 중국보다 훨씬 발전해갔다. 물론 그것이 지나쳐서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의 유희가 되었지만 말이다.

우계 성혼이 임진왜란 때 임금을 두고 도망했다는 것도 사실 왜곡이었다. 선조가 피난을 가다가 성혼이 사는 지역을 지나가는 데 함께 수행했던 이홍로라는 자가 아무 집을 가리키며 성혼의 집인데 그가 나오지 않는다고 무고한 것이다. 이홍로는 당시 동인으로서 광해군때 유영경과 더불어 소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자이다. 성혼은 선조를 찾아 뒤따르다 광해군을 만나 광해군의 분조에서 함께 있었다.

서인은 자신들의 대스승인 이이와 성혼이 이토록 치졸한 비난에 직면하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율우의 문묘종사에 대해서 임금인 인조가 반대하고 나섰다. 쿠데타로 집권한 인조는 그것을 빌미로 힘을 키우는 서인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남인을 보호하며 서인을 견제했는데 특히 율우의 문묘종사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는 인조가 이를 허락할 리가 없었다. 결국 율우의 문묘종사는 숙종대가 되어서야 성사가 되었는데 이조차도 남인과 서인이 번갈아 정권을 잡으면서 출향과 배향이 반복되었다.


서로의 사상을 존중했던 율우의 시대

율우의 문묘종사로 서인과 남인이 크게 배척하였지만 사실 이이와 성혼은 당론에 국한되지 않고 자유롭게 사상을 토론했던 학자였다. 앞서 설명했듯이 주자에 의해서 이기이원론으로 정리된 성리학에 대해 이이는 이기일원론을 펴며 이상과 현실은 분리되어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理)와 기(氣)가 분리되어 있다는 주자학의 논리는 북방민족에 의해 유교가 핍박받던 남송시대의 반영이었다. 진리로서의 이(理)가 현실정치에서 기(氣)로 나타나지 않는 것에 대해 둘이 분리되어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황 역시 훈구파에 의해 도학정치가 탄압받는 조선의 현실에서 더욱 이(理)를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사림파가 주류가 되어 도학정치를 통해 조선을 경장기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이는 현실의 반영인 기(氣)가 진리인 이(理)와 분리되어 있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기(氣)는 이(理)의 현실적인 반영이기 때문에 두 개의 가치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다.

이이의 이런 견해에 대해 성혼은 오히려 이황의 주장을 옹호하면서 “인심과 도심이 구분되어 있다는 이황의 논의도 잘못된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라고 하면서 이이와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다. 이것이 인심-도심 논쟁으로 인심은 기(氣), 혹은 칠정(희노애락애오욕)을 말하는 것이고, 도심은 이(理), 혹은 사단(인의예지)을 말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인심-도심 논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어 당시 학문의 이정표가 되었다. 따라서 이황의 주장을 이어온 성혼이 단지 서인이라는 이유로 남인에게 그토록 배척된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이를 스승으로 모셨던 서인이 그의 개혁적인 사상을 외면하면서 문묘종사에만 매달린 것도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화된 당쟁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송논쟁, 공존이 불가능해지다

결정적으로 서인과 남인이 공존을 버리게 된 계기는 예송논쟁이었다. 예송논쟁은 효종과 효종비가 죽었을 때, 그때까지 살아있었던 계모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동안 입어야하냐는 논쟁이었다. 자의대비는 인조의 계비로 인조의 둘째아들인 효종보다도 5살 어렸다.

처음 논쟁이 시작되었을 때, 서인을 대표하던 송시열은 순수한 학문적인 견해차이로 여겼다. 「주자가례」에는 자식이 죽었을 때, 장자에 대해서는 부모상과 같은 3년복을 입고, 차자 이하는 모두 1년복을 입도록 되어 있었다. 효종은 둘째아들이기 때문에 송시열은 자의대비가 1년복을 입어야한다고 주청하였는데, 이에 대해 남인인 예조참의 윤휴가 이의를 제기하여 장자인 소현세자가 죽은 후, 효종이 장자의 지위를 승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례」의 주석을 인용한 것이다.

이에 대해 송시열은 같은 「의례」를 인용하여 가통을 계승하여도 3년복을 입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하며 유명한 ‘체이부정(體而不正)’을 이야기하였다. 체이부정은 ‘몸(體)’은 아버지를 이었지만, 적장자가 아닌 경우로 효종을 말하는 것이고, 반대로 장자인 소현세자는 ‘정이부체(正而不體, 적장자이지만, 가통을 잇지 못한 경우)’가 된다.

이조판서였던 송시열은 당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예학의 대가였고, 그만큼 자부심이 강했다. 그런 차에 윤휴가 예학을 가지고 상대를 걸어왔으니 송시열로서는 가소로운 기분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송시열의 자만은 왕조국가에서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하게 만들었다. ‘체이부정’이 바로 그것인데 일반사대부는 분가를 통해 가통을 새로 세우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지만 단 하나의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다투는 왕가에 가통을 잇지 못했다는 말을 하는 것은 자칫 역모로 연결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예학의 입장에서, 또 임금을 제일사대부로 사고하는 사림의 입장에서 주장을 한 것이지만 향후 남인은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결국 송시열을 죽음에까지 몰고 갔다.

영의정 정태화는 송시열의 논리를 듣고 깜짝 놀라 송시열을 타일러 한 발 물러나게 했다. 그래서 송시열도 「대명률」을 인용하여 자식의 상에는 모두 1년복을 입는다고 타협했다. 하지만 이미 송시열을 꺾고자 하는 남인의 욕망은 선을 넘어버렸다. 특히 돌격대장을 자처한 윤선도는 “아버지를 이었으면서도 정통이 아니라면 가짜왕이라는 말인가”라고 하면서 아주 단순하고 과격하게 송시열을 역적으로 몰았다. 송시열과 서인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종은 남인의 손을 들어 서인을 몰아내었고, 정국은 남인이 주도하게 되었다.

예송논쟁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나는 당쟁이 살육의 현장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송시열이 예학의 측면에서 제기했던 주장을 남인이 역모로 몰아가면서 서인과 남인이 완전히 등을 돌려버렸고, 당쟁의 시대인 숙종대에서는 집권당이 바뀔 때마다 대규모 살육이 전개되었다. 이기지 않으면 죽게 되는 제로섬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두 번째는 서인과 남인이 결정적으로 사상적인 분리가 시작된 것이다. 사실 이런 의미에서 예송논쟁이 마냥 관념의 유희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송시열과 서인은 임금을 제일사대부로 여겼으며, 예외 없이 사대부의 예(禮)를 따라야한다고 여겼다. 반면 남인은 왕가에는 일반사대부와는 다른 예가 적용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그것이 서인을 공격하기위한 논리였지만 향후 남인은 예송논쟁을 바탕으로 왕권이 강화되어야한다는 입장을 갖게 된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던 정조가 남인을 중용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예송논쟁은 왕권을 견제하고자 했던 서인과 왕과 더불어 서인과 맞서고자 했던 남인을 명확히 분리했다. 당쟁이 공존하기 힘든 국가의 정체성 논쟁으로 발전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어느 쪽을 결실을 얻지 못하고 양쪽 다 무너지면서 세도정치로 이어졌다는 것이지만, 만약 어느 쪽으로든 결론이 나서 과두정치 혹은 절대왕정으로 귀결되었다면 예송논쟁은 좀 더 다른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