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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조선의 당(이원표)

(28호) ③ 사림, 분당하다

사림, 분당하다

 

을해당론

선조 8년인 1575년, 이이의 주도로 김효원과 심의겸이 지방관으로 파견되었다. 중앙의 관리가 지방직을 도는 것은 하나의 관례였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별로 대수롭지 않으나, 역사는 이 일을 ‘을해당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유는 이들이 사림 분당의 결정적인 인물들이기 때문이고, 이이는 양 측을 화해시키기에 앞서 주모자들을 떨어뜨려놓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 갈라서기 시작한 사람은 다시 화합하지 못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추천되자, 이조참의로 있던 신의겸은 김효원을 권력에 아첨하는 자라 하여 반대하였다. 명종 때, 공무 차 당시 권세가인 윤원형(문정왕후의 남동생)의 집에 들렀을 때, 김효원의 이부자리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출세를 노리던 많은 사대부들이 절대권력을 누리고 있던 윤원형의 집에 붙어있었는데, 신의겸은 김효원도 이런 무리 중에 하나로 본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오해였다. 김효원의 장인은 윤원형의 애첩, 정난정의 사촌 되는 사람이었다. 당시 김효원은 사람들의 욕을 살까 두려워 거리를 두었는데, 그 장인이 똑똑한 사위를 자랑하려고 억지로 끌고 온 것이었다. 심의겸의 반대로 김효원은 몇 해 뒤에나 이조정랑에 오를 수 있었다. 그 뒤, 김효원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아우 신충겸이 추천되었는데, 김효원은 이조의 자리에 외척이 올라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였다. 심의겸 형제는 명종 비의 일족이었으므로 외척이기는 했는데, 외척으로서의 권세를 누린 적이 없고, 둘 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기 때문에 해당이 없는 이야기지만 이조정랑은 전임자의 추천으로 임명되는 자리였기 때문에 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김효원과 심의겸은 앙숙이 되었고, 다른 사대부들은 김효원을 지지하는 측과 신의겸을 지지하는 측으로 갈리었다. 김효원의 집이 동쪽인 건천동에 있어 이들을 동인, 심의겸의 집이 서쪽인 정동에 있어 이들을 서인이라 불렀다.

분당의 계기가 된 두 사람은 후에 지방직을 돌면서 자신들로 인하여 중앙정계가 당쟁으로 치닫는 것을 보고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만나 화해를 했다고 하는데, 한 번 갈라진 사림은 다시 세도가의 시대가 될 때까지 치열한 논쟁을 거두지 못했다.

 

이조정랑이라는 자리

그런데 왜 정승, 판서도 아닌 정5품에 불과한 정랑의 자리를 두고 사림이 갈라섰을까. 이것역시 조선 특유의 정치제도에서 기인한다. 알다시피 이조는 관리의 인사권을 담당하는 부서로 6조 중에서 최요직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 중에서 관리를 천거하는 역할을 하는 이조전랑(정랑과 좌랑)은 특수한 역할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대신에 대한 추천권이다. 이 추천권은 이조판서는 물론, 왕도 관여할 수 없는 권한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사림은 삼사를 통해서 훈구파의 조선을 개혁한 바 있다. 왕을 비롯하여 관리에 대한 감사권한을 가지고 있는 삼사는 흔히 청요직이라 불리며 대단한 존경을 받는 자리였다. 삼사의 탄핵을 당한 대신은 사실여부를 떠나 일단 사직하는 것이 관례였을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고, 그 만큼 청렴하고 반듯한 이들만 오를 수 있는 자리로 여겨졌다. 때문에 이런 삼사 대신들은 왕이나 정승, 판서가 임명하지 않는다. 이들에 대해 추천권한이 있는 관리가 바로 정5품인 이조정랑이다. 즉, 권력자가 아닌 이제 막 출사한 젊은 사대부들에게 사실상 임명권한을 준 것이다. 이 때문에 삼사의 대신들이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제대로 ‘사정의 칼’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다. 하위직이 고위직을 임명하는 조선 특유의 제도인 셈이다.

때문에 후에 당쟁이 횡행할 때, 이조정랑의 자리는 정승, 판서보다도 중요한 자리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정승, 판서도 삼사의 탄핵을 받으면 사실여부를 떠나 일단 물러나야하고, 그 삼사의 대신을 추천하는 것이 이조정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분당의 원인이 개인적 원한일까

제1차 세계대전은 ‘사라예보의 총성’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에서 찾지 않는다. 이미 세계는 전쟁의 한복판이었고, 사라예보 사건은 도화선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조선 사림의 분열을 김효원과 심의겸의 다툼에서 찾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선조를 옹립하고, 사림의 집권에 크게 기여한 이준경은 죽기 직전 동서분당을 예고한 바 있다. 아직 분당 전이었던 시기에 이준경이 이렇게 예고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사림이 두 갈래로 나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준경이 죽으면서 남긴 말에 대해 이이와 유성룡 등이 크게 반발했고, 특히 이이는 ‘죽기 전에 그 말이 너무 악하다’라며 크게 화를 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둘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미 대부분의 사림들은 이이와 유성룡 주변에 모여들고 있었다.

특히 사림의 분열에는 이이의 책임이 크다. 주자에 의해 완성된 성리학은 본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에서 이(理)를 우선하고, 이(理)에서 기(氣)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천철학을 중시했던 이이는 사람이 감각할 수 있는 기(氣)를 강조하여 이(理)와 기(氣)는 통일되어 있다(理氣不相離)는 주기론일 편다. 이이의 이런 실천적인 경향에 많은 젊은 사대부들이 모여들었고, 심의겸도 이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실제로 이준경은 이이 주변에 젊은 사대부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고 당쟁의 조짐을 읽은 것이다.

개혁적이고, 실천적인 이이는 출사하지 않고, 자기 수양에만 몰두하는 사대부들을 비판했다. 사실 주자학이라는 것이 불교의 폐단에 대응하여 대안으로 등장했던 것이어서 자기수양이라는 불교적인 측면이 숨어있다. 그래서 상당수의 사대부들은 입신양명보다 조용히 은거하는 선비를 더 칭송하였다. 그런 사대부들의 존경을 받던 이황은 이이를 두고 ‘너무 벼슬을 탐한다’고 꼬집었을 정도였으니 이이의 주변과 기존의 사림 세력들이 확연히 다른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런 와중에 이이와 가까운 심의겸이 김효원을 탄핵하여 벼슬길을 막았으니 후에 동인이 되는 사대부들은 발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각 유성룡이 김효원을 변호하고 나서면서 잠재해있던 분열의 씨앗이 싹텄다.

 

동인과 서인

김효원과 심의겸을 외직으로 보내어 분열을 막으려했던 이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림은 갈라섰다. 유성룡도 뒤 늦게 후회했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갈라선 사림이었다. 동인은 대사헌 허엽을, 서인은 좌의정 박순을 영수로 추대하여 200년 논쟁의 길로 들어섰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이는 서인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유성룡은 동인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다. 38세에 정승에 오른 명재상 이덕형은 동인, 후에 남인에 가담했고, 그의 절친 이항복은 서인이었다. 당쟁에 뛰어든 명재상들은 국난의 위기 속에서 각기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갔고, 정치적인 위기에 당과 운명을 같이했다. 이항복은 전란의 와중에 병조판서로서 이순신을 잘라내는 악역을 맡기도 했고, 광해군 때에는 북인 정권에 의해 수난 끝에 유배지에서 죽고 말았다.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젊은 나이에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이덕형도 집권 동인이 갈라설 때, 장인 이산해를 버리고 유성룡을 택해 남인이 되었다가 역시 유배를 전전했다.

대개 이 명재상들을 당쟁의 희생물로 그리는 경향이 많은데, 사실 이들도 중요한 기로에서 정치적 판단에 의해 당을 선택하고 행동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당과 운명을 함께 한 것이다. 이들이 단순히 사욕에 의한 붕당(朋黨)에 불과하다면 왜 절친인 오성과 한음은 당이 달랐으며, 한음 이덕형은 북인의 영수였던 장인을 두고 유성룡과 뜻을 합했겠는가. 그들에게는 이뤄야하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고, 그에 따라 결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찌 보면 세도가와 그의 가신들로 이뤄진 이제까지의 정치에 비해 훨씬 진일보한 형태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많은 부작용이 뒤따른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 논쟁의 역사는 더욱 치열해진다.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