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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세계의 분쟁지역(이원표)

(24호) 유럽의 화약고, 구 유고연방

유럽의 화약고, 구 유고연방

세계의 분쟁지역 ⑦


다른 배경, 다른 역사

일곱 개의 국경, 여섯 개의 공화국, 다섯 개의 민족, 네 개의 언어, 세 개의 종교, 두 개의 문자, 하나의 국가. 구 유고연방의 복잡한 환경을 표현했던 유명한 말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티토라는 탁월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1980년 티토 대통령이 사망하고 냉전이 무너지면서 민족 간의 분쟁이 비극을 가져왔다.
동로마제국의 멸망이후, 발칸반도는 오스만제국이 지배했다. 그러다 발칸전쟁으로 오스만제국이 물러나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배하면서 이 지역에 슬라브 민족이 결집하여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을 수립(1918)했다. 그 뒤, 1929년에 국왕 알레산다르 1세가 국명을 유고슬라비아로 바꾸었는데, ‘남(南)슬라브족의 땅’이라는 뜻이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에 점령되어 수명을 다했고, 점령기 동안 티토가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게릴라전을 전개하다가 독일의 패망으로 해방을 맞았다. 그 해 11월, 티토를 수반으로 하는 연방인민공화국
이 수립되었으며, 63년에는 신헌법을 제정하여 국명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으로 개칭되었다.
티토가 이끌었던 유고는 소련의 패권주의에 맞서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소위 ‘티토주의’라고 불리는 강한 민족주의로 일관했다. 스탈린은 이런 유고를 고립시켜 티토를 축출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그것이 유고의 단결을 가져왔고, 스탈린 사후 흐르시초프 등 새로운 소련 지도자들은 티토의 주장을 받아들여 유고의 독자성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티토가 사망(1980)한 뒤, 민족분규를 겪게 되고 소련 해체와 더불어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되면서 유고연방을 이루었던 각 공화국이 독립의 길을 가게 되었다. 91년에 크
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가 차례로 독립하고, 이듬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독립하여 연방은 사실상 해체되었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만이 신(新)유고연방을 결성하지만 2006년에 몬테네그로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유고라는 이름은 완전히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이런 해체의 과정은 학살과 전쟁을 수반하여 끔직한 기록을 남겼고, 현재까지 상흔이 남아있다.



민족 문제보다는 빈부 격차로 인한 갈등이 더 크다

한 세기에 걸쳐 연방을 구성했던 유고가 단순히 민족 갈등으로 해체되었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약하다. 사실 유고 연방의 해체는 그것보다 더 실제적인 문제, 즉 남북 간의 빈부 격차가 더 큰 원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해체 과정에서 참극이 발생한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고 연방에서 가장 먼저 독립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공업화가 가장 많이 이루어진 선진 지역이었다. 이 두 지역은 과거 로마제국이 붕괴될 때, 서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나머지  4개의 공화국은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
다. 상대적으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유럽의 영향권 하에서 근대화가 진행된 반면, 다른 곳은 오스만제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어 현재의 차이가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유고 연방 내에서 이 두 지역의 부가 다른 공화국으로 이전되어 개발자금으로 쓰였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주민들은 여기에 대해 불만이 높았고,  동유럽 공산주의가 붕괴되면서 가장 먼저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유고 연방 전체로 보면 세르비아인이 40% 정도로 다수파이지만 대개는 세르비아공화국에 거주하고 있고, 슬로베니아나 크로아티아에서는 소수파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부유한 지역인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하는 것은 세르비아로서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세르비아가 연방의 해체에 강력히 저항한 것은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유한 지역이면서 민족구성이 복잡하지 않았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비교적 쉽게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슬로베니아보다는 세르비아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크로아티아에서는 세르비아인들이 크로아티아로부터 다시 독립하여 크라이너 세르비아 공화국이라는 미니공화국을 세웠지만, 3년만에 크로아티아에게 점령당했고, 이 과정에서 20만명이 넘는 세르비아 난민이 발생했다.



가장 참을 수 없는 단어, ‘민족정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하자 유고연방의 최남단에 위치한 마케도니아도 독립을 선언하여 비교적 쉽게 독립을 성취했다. 이 세 공화국은 각각 거주민의 90%가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마케도니아인으로 비교적 간단한 민족구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독립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는 문제가 좀 더 복잡했다. 유고연방의 축소판인 보스니아는 독립을 위한 내전이 시작되었을 때, 이슬람교도가 45%, 세르비아인이 40%, 크로아티아인이 30%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세 민족은 모두 ‘민족정화’를 내세우며 격렬하게 대립했고, 이 과정에서 20만명이 넘는 사망자와 2백만명에 달하는 난민이 발생하였다.
보스니아는 92년에 독립을 선언하지만 이것은 내전의 시작을 의미할 뿐이었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그리고 이슬람국가들의 지원 하에 내전은 격렬한 민족 간 학살로 전개되었고, 국제사회는 보스니아 분쟁의 원인을 세르비아의 강권적인 행동에 있다고 보고 세르비아가 주축이 되어 결성된 신(新)유고연방에 대해 제제를 가했다. 그러나 민족정화는 세르비아인이 크로아티아인과 무슬림에게 행한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다. 이 세 민족 모두가 가해자고 피해자였다. 그러나 94년에 분쟁 당사자 중 크로아티아인과 무슬림은 연방국가 수립에 합의한 반면, 세르비아인 측이 거부하여 국제사회의 비난을 자초한 측면도 있다. 결국 세르비아인 세력에 대한 NATO의 대규모 폭격이 가해졌고, 95년에 보스니아는 하나의 국가를 유지하되 세르비아 자치정부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렇게 보스니아는 무슬림과 크로아티아인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세르비아인의 스르프스카 공화국(자치정부), 두 개의 체제로 출발하게 되었다.



비극의 땅, 코소보

세르비아공화국 내에 있는 코소보는 알바니아계 주민이 90%이고 거의 무슬림이다. 때문에 구 유고연방 시절부터 공화국과 같은 정도의 자치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89년부터 세르비아공화국이 자치권을 축소하면서 독립운동이 치열해졌다. 90년에 독립을 선언하고, 92년에는 대통령을 선출하는 한편, 코소보해방군(KLA)을 결성하여 무력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코소보해방군과 세르비아 치안부대 간의 무력충돌로 내전양상으로 발전하자 세르비아는 대규모   KLA 소탕작전을 펼친다.       이에 대해 유엔
은 중재에 나서고, NATO는 민족정화 등 중대한 인권침해가 있다는 이유로 세르비아에 폭격을 가한다.
코소보에 대한 세르비아의 집착은 단순히 영토 문제만은 아니다. 사실 코소보는 중세 세르비아 왕국의 중심지였다. 동방정교회의 교회도 여기에 세워졌는데, 14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받아 점령되었고, 세르비아의 수도가 있었던 지역이었던 만큼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것이 유명한 코소보 전투(1389년)인데, 세르비아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희생하여 기독교 세계를 지켰다고 자부한다. 오스만 제국이 코소보를 점령하고 나서 더 이상 진군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고, 그대로 영토를 확정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코소보는 다수의 알바니아인이 이주해왔다. 이런 역사 때문에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고, 나아가 무슬림인 알바니아인들에게 적대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보스니아 내전에서 국제사회에 ‘가해자-세르비아, 피해자-무슬림’이라는 인상이 깊게 남겨져 있던 터에 코소보에 대한 세르비아의 태도는 충분히 제제꺼리가 되었다. 그런데 NATO의 폭격은 오히려 알바니아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의 빌미가 되었다. 평화유지군이 오히려 평화를 더욱 심각하게 위협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90만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하고, 오폭으로 인한 민간인 희생까지 더해 코소보 문제는 NATO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강대국들의 일은 국제사회에서 문제가 안된다. 민족정화를 주도했던 밀로세비치는 재판정에 섰지만 NATO의 폭격은 논문이나 저널리즘의 주제 밖에는 되지 않았다.
UN의 보호 아래 있던 코소보는 2008년 2월 17일, 국제합의 없이 독립을 선언했다. 현재 61개 국가가 코소보 독립을 인정하고 있고, 14개 국가가 대사관을 두고 있다. 한국도 재작년에 독립을 인정하였다.(주로 미국의 영향권에 있는 국가들이 독립을 인정) 그러나 러시아가 여전히 독립을 반대하면서 UN 안보리에서 코소보의 독립 선언은 무효라 주장하고 있고, 스페인 등 아직 많은 국가들이 독립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평화에 목마른 땅

2006년 5월 21일 몬테네그로가 국민투표를 통해 연방에서 분리되었다. 이로써 결국 유고 연방은 아직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한 코소보까지 7개의 국가로 해체되었다. 몬테네그로를 제외하고 분리과정에서 모두 내전이 있었고, 코소보의 경우는 아직 진행중이라 할 수 있다. 몬테네그로는 발칸제국 중에 유일하게 오스만의 지배를 받지 않았고, 오스만제국 시대에 민중들이 선출한 주교가 지도해 온 지역이었으며, 오스만제국의 골칫거리 역할을 해왔다. 그러다 발칸전쟁 때, 세르비아와 연합하여 오스만제국을 물리쳤고, 이후 줄곧 세르비아와 행보를 함께 해왔다. 독일의 점령 하에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티토의 유격대 중 몬테네그로 출신의 공산주의자들은 가장 강경파였고, 이후에도 유고슬라비아의 주축이 되어왔다. 때문에 몬테네그로가 마지막으로 독립을 결정했을 때, 세르비아가 이를 용인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구 유고연방의 국가들은 고대 로마제국이 분열할 때부터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이어 오스만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끊임없이 투쟁해왔고,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티토의 지도가 사라진 이후에는 끊임없는 민족 분쟁을 겪으면서 수십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난민을 만들어냈다. 유럽에서 가장 불안한 지역인 이곳은, 그래서 항상 NATO와 UN이 주시하고 있는 지역이다.
비록 코소보는 인정받고 있지 못하지만 7개의 국가로 분리된 지금, 자그마한 평화가 찾아왔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 민중의 삶은 결코 평화롭지 않다. 실업자가 넘쳐나고 있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분쟁의 불씨 덕에 삶은 안정적이지 않다. 불안정한 삶은 과거의 유물을 꺼내게 만든다.
배고픔이 해결되지 않는데, 군대를 - 그 이름이 설사 평화유지군이라도 - 주둔시켜 놓는다고 평화가 오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