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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료/이 달의 시

(14호) 까치네 집 - 이진수 까치네 집 이진수 그럼에도 저것이 살 만한 주거환경이라고 즐거워한다. 기껏해야 나뭇가지 몇 개와 마른 풀 몇 올이 전부인데, 그래도 좋아라고 구김살 하나 없이 환하게들 피어 있다. 공부방이 없어도 칭얼대지 않고 전봇대에 세들어 살아도 불평 한 마디 없다. 집 한 채 소유하는 일이나 무슨 一家를 이뤄보겠다는 욕심에서 끝내 자유롭지 못한 나 같은 짐승이 삶을 좀먹는 동안에도 까치네 집 식구들 제 사는 것이 언제나 고맙다고……. 이진수 《노동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그늘을 밀어내지 않는다』. 대전충남작가회의 회원. 더보기
(13호) 마늘촛불 - 복효근 마늘촛불 복효근 삼겹살 함께 싸 먹으라고 얇게 저며 내 놓은 마늘쪽 초록색 심지 같은 것이 뾰족하니 박혀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마늘어미의 태 안에 앉아 있는 마늘아기와 같은 것인데 알을 잔뜩 품은 굴비를 구워 먹을 때처럼 속이 짜안하니 코끝을 울린다 무심코 된장에 찍어 씹어 삼키는데 들이킨 소주 때문인지 그 초록색 심지에 불이 붙었는지 그 무슨 비애 같은 것이 뉘우침 같은 것이 촛불처럼 내 안의 어둠을 살짝 걷어내면서 헛헛한 속을 밝히는 것 같아서 나도 누구에겐가 싹이 막 돋기 시작한 마늘처럼 조금은 매콤하게 조금은 아릿하면서 그리고 조금은 환하게 불 밝히는 사랑이고 싶은 것이다 복효근 1962년 전북 남원 출생. 1991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버마재비 사.. 더보기
(12호) 거웃을 물들이는 사내 - 차승호 거웃을 물들이는 사내 차승호 들판에서 불린 몸 빼내어 추수 끝나고 묵은 때와의 한판 목욕탕 수돗가로 걸어가니, 후미진 끄트머리 귀밑머리 길게 길러 정수배기 쪽으로 쓸어 넘기고 쓸어 넘긴 사내 중방리에서 대대로 농사짓는 아는 얼굴의 사내 칫솔로 염색약 찍어 거웃을 물들이고 있네 나이 들면 거기도 허옇게 세는가 투박한 사내의 손길을 따라 천년의 우물가 물먹은 돌이끼처럼 새까맣게 일어서는 거웃 나날이 변방으로 밀려 황량해진 들판에 씨 뿌리듯 모내기하듯 사내의 눈빛 참 진지하네 한 올 한 올 염색약 칠해가며 사내는 들판의 부활을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자꾸 쳐다보는 내 눈길 의식한 듯해 어물쩍 선수를 치네 농사꾼은 워디가도 표난다니께 정성들여 가꿨으니 안사람이든 들판이든 한 십년 찍어누르는 건 일도 아니겄구먼그류.. 더보기
(11호) 장마 이후 - 이정섭 장마 이후 이정섭 또 어떤 생이 잠들어 노을이 진다 붉은 빛에 기대어 나는 깨어나 임산부의 배처럼 부푼 저녁 속으로 걸어간다 연이은 출산 물방울이 낳은 검은 아이들이 웅덩이를 닫고 제방의 주둥이를 메우고 웃자란 터럭을 매끈하게 깎아낸다 독버섯처럼 먹구름 다시 자라겠지만 빗물을 깨끗이 털어낸 아이들은 좁은 관 속에서 무럭무럭 잠을 키운다 김 서린 관을 닦을 때 합장合葬하듯 별은 지는데 배불리 별을 먹고 관 밖을 나서는 잠, 빳빳하던 이승은 나비가 앉고 뜨기를 반복해서야 비로소 붉게 누워 얌전해진다 이정섭 대전 출생. 2005년 《문학마당》으로 등단. 시집 『유령들』. 더보기
(10호) 연꽃 근처 - 이정섭 연꽃 근처 이정섭 그 밤이었을 거예요 언제나 왼편 어디쯤 서성이는 우리는 연등 하나 밝힐 수 없었는데요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무슨 말인가 목쉰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눈물만 요란했는데요 초파일은 지난 지 오래 가난한 길손 대신 손등을 드는 밤, 추녀에 매달린 왼쪽 날개가 상하고서는 못 속에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없었겠지요 흙먼지 휘감듯 멱살을 잡는 산길의 반란으로 의지할 먼 불빛도 없이 돌아온 장터, 막차는 벌써 우리를 등졌던데요 그 날처럼 내리는 비를 맞으며 술 취한 아버지는 비틀거리고요 바람의 화법을 채 익히지 못한 비구는 늙어 헛바퀴만 밟아대고요 팔십년엔가 지어졌다는 다리 밑에서 부쩍 해쓱해진, 연꽃 그 참담한 경계, 이백 미터를 넘어가면 다리도 끊기는데 석회더미를 뒤집어 쓴 그 날 밤처럼 연꽃은 알.. 더보기
(9호) 너희를 죽이고 가마. - 송경동 너희를 죽이고 가마. 용산 참사 열사들을 생각하며 송경동 나는 네 번 죽었다. 첫 죽음은 이 자본주의 사회의 가난하고 평범한 이로 태어난 죄였다. 차별과 기회 불균등 속에서 어린 동심을 죽이고 소년, 소녀의 꿈을 죽이고 청년의 가슴을 죽였다. 살아야겠기에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며 이상과 이성과 용기와 사랑과 연대의 마음을 내 스스로 죽여야했다. 두 번째 죽음은 철거였다. 당신은 이 세상의 새들어 사는 '하찮은 이'였다는 통보. 이 세계에서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이방인, 외지인 딱지. 하늘과 땅 사이 깃들 수 없는 부평초 인생. 쓰라린 가슴이 동굴 속처럼 텅 비었다. 세 번째 죽음은 화염이었다. 뿌리 뽑힌 주소지를 들고 망루에 오르자 너희들은 하늘로 가서 살라고 이 땅에서 얻는 몸마저 뺏어 훨훨 날아.. 더보기
(7호) 만추 - 김광선 만추 김광선 이십 년을 넘게 산 아내가 빈 지갑을 펴 보이며 나 만 원만 주면 안 되냐고 한다 낡은 금고 얼른 열어 파란 지폐 한 장 선뜻 내주고 일일장부에 “꽃값 만 원”이라고 적었더니 꽃은 무슨 꽃, 아내의 귀밑에 감물이 든다. * 김광선 전남 고흥 출생. 2003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겨울삽화』. 더보기
(6호) 원근법 배우는 시간 - 송진권 원근법 배우는 시간 송진권 나무들이 소실점 끝으로 사라지고 있네 구름들이 빠르게 그곳으로 빨려 들고 있네 당신 눈이 만들어낸 속임수를 조심하세요 여기는 불의 땅 여기는 넝쿨식물의 나라 외곬수인 곰들의 말을 믿지 마세요 사탕발림하는 여우의 말도 믿지 마세요 당신 눈과 귀를 의심하세요 안 그러면 여기에서 깨끗이 지워지거나 천길 나락 낭떠러지로 떨어질 거예요 지나온 집들마다 당신 할머니와 어머니가 살아요 호박빛 들창에 불을 밝히고 식은 국을 다시 데우며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릴 거예요 어서 당신 집으로 돌아가세요 당신이 비롯된 곳 모든 것이 비롯되는 처음으로 나는 아무리 꼬리를 저어도 물속에 들지 못하는 물고기 그가 지우개로 지울까 어쩔까 고민하는 물고기 구름들이 뭉게뭉게 그곳에서 피어나고 있네 나무들이 무릎을.. 더보기
(5호) 곰달래길 사람들 - 이지혜 곰달래길 사람들 이 지 혜 퇴근길 막아서는 예산댁 실내포장마차 네 개뿐인 자리엔 오늘도 철물점 제욱 씨 자리만 남아 있다 돼지 기름띠가 조청처럼 흐르는 달력 위에서 오래된 시계추가 끈적끈적하게 오가고 취한 입담이 석쇠를 달궈 탄내나는 생들을 익힌다 네 번째 마누라 가출담을 자랑처럼 마시는 복덕방 김사장 노총각 은지 삼촌은 끝내 못마땅하다 술잔을 뿌리며 한판 붙자는 김사장 소매 끝에 술 동냥 다니는 순자할매가 매달린다 왕년에 소리기생이었던 할매 노래 솜씨에 싸움은 금세 멈추고 한잔 얻어 마신 곡조에 맞춰 휠체어 끄는 소리, 턱을 없앤 문턱을 켠다 그 시간 앞집 철물점 문 닫을 시간 빈 나뭇가지에 걸린 바람소리 심란할 시간 꿈속에서도 달리는 제욱 씨 술잔으로 구멍 난 벽을 타고 달빛이 잠긴다 장군할배 파지가.. 더보기
(4호) 혁명의 낌새 - 김병호 혁명의 낌새 김병호 하나의 유령이 마을을 떠돌고 있다. 들판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새벽이 깊음 위에 있고 물안개가 수면에 운행하니 이 위에서 각각의 생존투쟁은 엔트로피와의 투쟁이다. 생은 생이고 죽음은 주검일 뿐, 죽은 자들에게 고향은 없다. 이제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며 그것은 바로 ‘끓는점’에 관한 것이다. 생명의 모든 행위는 흩어짐에서 시작한다. 그러하니 잠에서 쫓겨난 이여, 침을 뱉어라. 이번 생이 내 마지막 생일지라도. * 이곳에 떠다니는 모든 문장은 원전이 있다. 김병호: 시인. 1998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과속방지턱을 베고 눕다』. 대전충남작가회의 회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