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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태민아빠의 펄프픽션(김모세)

(21호) 화차(火車) :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화차(火車) :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태민아빠의 펄프픽션 6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20대의 젊은이한테 천만 엔, 2천만 엔을 빌려주는 업자가 있다는 자체가 이상한 거죠. 그렇지만 현실에는 있습니다. 빌려 주고, 빌려 주고, 또 빌려 주는 거죠. 마지막 책임을 묻는 곳이 자기 회사만 아니면 됩니다. …… 그런 굴레 속에서 채무자는 점점 아래로 굴러 떨어져 다중채무자라는 이름으로 결박되어 두 번 다시 떠오를 수 없도록 가라앉는 겁니다. - 본문 137쪽

특히 젊은이들이 이런 속임수에 걸리기 쉽습니다. 소비자신용은 젊은 층을 공략함으로써 이용자를 늘리기 마련이니까요. …… 시중 은행이며 카드업계가 학생에게 신용카드를 발급한 지 20년째가 되는데요. 이 20년간 대학이나 중‧고등학교에서 신용카드의 올바른 사용법을 지도해 준 적이 있습니까? 일선 고등학교에서는 졸업 전 여학생들에게 화장법을 가르치곤 하던데 사회에 진출하기 전 신용카드나 돈의 올바른 사용법과 기초지식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본문 139쪽



근무 중 사고로 휴직중인 형사 혼마는 조카의 실종된 약혼녀 세키네 쇼코를 찾아 나선다. 소설은 혼마의 시선을 따라 흐트러진 퍼즐 조각을 맞추듯 그녀의 과거를 한 조각 한 조각 맞추어 나간다. 추적과정에서 놀라운 쇼코의 정체가 조금씩 들어나고 혼마는 화차(火車 : 생전에 악행을 한 망자를 태워 지옥으로 옮기는 불수레)를 타게 된 다중채무자의 숨겨진 비극을 밝혀낸다.

화차는 일본의 거품경제가 붕괴되는 1990년대 초에 연재되었다. 작가는 소설을 통하여 개인 파산자와 다중 채무자의 문제를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접근한다. 앞에서 인용한 본문처럼 고도의 금융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용불량자의 문제를 사치와 낭비, 무절제, 도덕적 해이와 같은 개인적 문제로 치부하는 것을 단연코 거부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을 화차(火車)로 내모는 끔찍한 시스템을 고발한다. 지금 일본의 모습이 10년 후 한국의 모습이라는 말처럼 1993년 발표된 소설의 상황은 10년 후인 2003년 한국에서 카드사태란 이름으로 그대로 재현되었다.

책의 말미 작품해설에서 평론가 사다카 마카토가 언급한 다중채무자와 살린 독가스 사건으로 일본을 충격에 빠뜨린 옴진리교의 관계는 예사롭지 않다. 집단생활을 하던 옴진리교의 신도들 중 다중채무자가 많았다. 돈을 받아내려는 폭력단들도 차마 그곳에는 침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용불량에 내몰린 사람들은 그곳에서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만나 옴진리교의 신자가 되었다. 신용카드와 옴진리교가 이상스럽게 연결된다. 그것이 현대 일본이다.

장르소설의 최고의 덕목은 재미이다. 아무리 고귀한 사상을 전파하고 숭고한 미덕을 설교해도 재미가 없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작가 미야베 미유키는 설교나 신파로 흐를 수 있는 주제를 흥미 진지한 추리소설로 이야기한다. 독자는 숨 한번 내쉬지 못하고 마지막 문장까지 그대로 질주한다. 마력적인 매력의 주인공 탐정도, 기기묘묘한 트릭도, 심장이 멎을 듯 한 반전도 없다. 혼마는 경찰 수사 매뉴얼처럼 쇼코의 호적을 확인하고 지인들을 만나 탐문하면서 소처럼 묵묵히 걸어간다. 얼핏 따분해 보이는 과정이 놀랍게도 독자들을 긴장감과 흥분으로 몰아넣는다.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는 그 세밀함에 탄성을 자아낸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내몰린 자들에 대한 작가의 따듯한 시선은 마지막 장을 다 읽고도 긴 여운에 잠시 손길을 머물게 한다. 미미여사(미야베 미유키의 애칭)의 상승내공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장녀라 불리는 미야베 미유키(宮部みゆき)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당대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다. 90년대 중반 이후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이 대거 소개되어 국내에도 탄탄한 지지층을 형성하고 있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읽힌 ‘모방범’을 좋아하는 독자들 중 간혹 ‘화차’를 혹평하는 경우가 있다. ‘모방범’의 방대한 분량과 스케일, 연쇄살인범이라는 자극적인 소재에 비하여 ‘화차’는 주제도 무겁고 이야기 전개도 담백하다. 개인적으로 ‘화차’를 미야베 미유키 문학의 진수이자 대표작으로 꼽는 이유는 ‘사건이 아닌 인간이 중심인 추리소설’이라는 작가의 특성이 가장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던 여인이 화차(火車)로 끌려가는 과정이 너무나 처연하여 슬프고 실제 현실은 소설보다 더욱 참혹하여 공포스럽다.

 

▶ 미야베 미유키의 다른 소설

이유. 1998.청어람미디어 : 1999년 나오키상 수상작. 일본 부동산버블을 다룬 소설. 버블경제와 함께 착공되고 버블의 붕괴와 함께 입주가 시작된 도쿄 도 아라카와 구 사카에쵸의 '반다루 센주기타 뉴시티'의 웨스트타워 2025호에서 일어난 '일가족 4인 살해 사건'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사건의 내막이 밝혀지는 과정을 통해 일본 사회에 내재된 '위태로운' 현실을 들추어낸다.

 

모방범(模倣犯). 2001. 문학동네 : 5년간의 신문연재, 1621쪽의 대작, 280만부 판매의 미야베 미유키의 최고 베스트셀러. 도쿄의 한 공원에서 쓰레기통에 버려진 여자의 오른팔과 핸드백이 발견된다. 핸드백의 주인은 삼 개월 전에 실종된 후루카와 마리코라는 20세 여성. 그러나 범인은 오른팔과 핸드백의 주인이 각각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텔레비전 방송국에 알려오고, 피해자의 외할아버지 아리마 요시오를 전화로 농락한다. 요시오는 있는 힘을 다해 범인에게 대응하지만, 끝내 마리코의 유해가 세상에 공개된다. 방송을 통해 자신의 범죄행각을 자랑하는 범인의 목소리에 전 일본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경찰 수사는 난항을 거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