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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태민아빠의 펄프픽션(김모세)

(18호) 빅 슬립 - 뒷골목의 고독하고 초라한 기사

빅 슬립 - 뒷골목의 고독하고 초라한 기사

태민아빠의 펄프픽션 3

기고 김모세 (중구당원)


깊이 눌러 쓴 중절모에 트렌치코트 깃을 세운 채 총을 든 남자, 사냥 모자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문 셜록 홈즈와 함께 대표적인 사립 탐정의 상징이다. 어두운 도시를 가로지르는 고독한 터프가이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페르소나 필립 말로로 시작되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첫 번째 장편소설 ‘빅 슬립(Big Sleep)'은 ’20세기 LA의 고독한 기사‘ 필립 말로의 탄생을 알리는 추리 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하드보일드의 음유시인 레이먼드 챈들러는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젊은 시절 런던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시와 수필을 쓰던 챈들러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51세가 되던 1939년 ‘빅 슬립’을 출간한다. 1954년 ‘기나긴 이별’까지 필립 말로를 주인공으로 하는 총 여섯 편의 장편을 남겼다. 주인공 필립 말로의 치명적인 매력과 폴 오스터, 무라카미 하루키를 위시한 많은 후배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문체는 레이먼드 챈들러를 단순한 추리소설 작가가 아닌 현대 미국소설의 위대한 신화로 남게 했다.

험프리 보가드 주연의 동명 영화로 유명한 ‘빅 슬립’은 필립 말로가 스턴우드 장군의 의뢰를 받으면 시작한다. 유서 깊은 가문의 재벌 스턴우드장군은 사라진 자신의 사위 러스티 리건의 행방을 의뢰한다. 필립 말로는 죽어가는 병약한 노인의 의뢰를 수락하고 리건의 행적을 조사한다. 소설의 처음 러스티 리건은 아일랜드 공화군 출신의 전직 밀주업자에다 방탕한 재벌가 딸을 꼬드긴 천박한 인상을 풍긴다. 조사가 계속 되면서 필립 말로는 리건에게서 타락과 방탕에 찌든 괴물 같은 장군의 딸과는    른 고귀함을 발견한다. 인간의 추악한 욕망과 죄악이 넘쳐 나는 도시 LA에서 필립 말로는 리건을 찾아 나선다.

183cm가 넘는 키에 85kg의 당당한 체구와 잘생긴 얼굴의 필립 말로는 지방검사 밑에서 수사관으로 일하다 해고 된 33세의 독신 사립탐정이다. 독신으로 비서도 없이 혼자 의뢰를 받고 모든 작업을 홀로 한다. 혼자 식사하고, 술을 마시고, 체스를 둔다. 조사 과정에서 약간의 불법도 마다지 않으며 경찰과 사이가 좋지 않다. 반면 의뢰인과의 신뢰는 끝까지 지킨다. 독설과 조롱을 입에 달고 사는 필립 말로는 색정광 여자가 발가벗고 달려들어도 뿌리칠 정도로 냉정하다. 필립 말로를 유혹하려다 실패한 리건의 아내 비비안이 ‘당신의 목을 면도칼로 그으면 무엇이 흐르는지 보고 싶다’고 하자 필립 말로가 대답한다. ‘송충이의 피겠지.’

필립 말로가 단순하게 고독하고 냉정한 터프가이였다면 하드보일드 탐정의 원조라는 명예만 부여잡고 있을 것이다. 숭고함이 사라진 타락한 도시에서 이미 없어져 버린 것을 찾는 쓸쓸한 모습이 필립 말로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다. 챈들러의 대부분의 소설에서 필립 말로가 실종된 사람의 행방을 좇는 과정은 인간의 가치를 찾아 나서는 행위다. 더러운 웅덩이 속에서 '깊은 잠(Big Sleep)'에 빠진 리건처럼 필립 말로가 찾은 것은 이미 변질되었다. 그가 찾는 것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있었어도 이미 변해버려 가치를 상실했을지도 모른다. 필립 말로는 성배를 찾는 기사처럼 대도시의 어둠속으로 향한다.

어김없이 12월이 찾아왔다. 용산 참사의 주검은 여전히 영안실에 갇혀있고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은 세상을 떠났다. 그 중 한 명은 절벽 아래로 스스로 몸을 날렸다. 진중권, 김제동, 손석희가 퇴출됐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결국 거리로 내몰렸고 철도 노동자들은 파업을 멈췄다. 미디어 법은 국회 날치기와 헌재를 거쳐 통과됐고 MB는 텔레비전으로 4대강을 살리겠다며 자신만만하다. 첫 원내 진출로 감격했지만 여전히 진보신당은 무의미한 지지율의 기타정당이다. 사상 최대의 무역흑자와 불황탈출을 떠들어대지만 지친 삶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야만의 2009년을 보내는 당원동지들에게 짧은 문장으로 감히 희망을 말한다.

‘여기 이 비열한 거리를 지나가야만 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도 않으며 세속에 물들지 않았으며 두려워하지도 않은 채.

(But down these mean streets a man must go who is not himself mean, who is neither tarnished nor afraid.)'


*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

1. 1939년 ‘빅 슬립(Big Sleep)'

2. 1940년 ‘안녕 내 사랑(Farewell, My Lovely)'

3. 1942년 ‘하이 윈도(High Window)'

4. 1943년 ‘호수의 여인(The lady in the Lake)'

5. 1949년 ‘리틀 시스터(The Little Sister)'

6. 1954년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으로 북하우스에서 출간됐습니다. 지난여름 연대순으로 여섯 편의 소설을 읽으며 조금씩 변모해가는 필립 말로를 지켜보는 재미는 이루 말 할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기나긴 이별’을 펼치면서 더 이상 읽을 책이 없다는 사실이 어찌나 아쉬웠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