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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영화 리뷰(이원표)

(11호) 황산벌 - 세가지 거시기

황산벌 - 세가지 거시기

이원표


삼국 말기의 시대를 현대의 언어로 풀어낸 희극, 황산벌은 당나라 황제와 고구려의 연개소문, 백제의 의자왕, 신라의 무열왕(김춘추)가 모여 회담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북한을 비유한 듯 한 연개소문의 말들이 유쾌하게 유통되는 것을 보니, 변화가 좋긴 좋구나하며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난다.

 

"전쟁은 정통성 없는 것들이 전통성 세우려고 하는 게야!"

 

전쟁, 연개소문의 말처럼 전쟁은 그 어떤 정의나 질서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 이들이 억지로라도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테러와 반테러 전쟁 중, 어느 것을 우리는 '정의'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누가 옳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현실이 전쟁에 투영되어있다. 정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라 말하려 전쟁을 하는 것이다.

백제의 5000 결사대의 장려한 투쟁만을 역사로 기억하는 우리는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병사들의 모습을 상기해야한다. 사기를 올리기 위해 단신으로 뛰어 들어가는 신라의 화랑과 뭔지도 모르지만 그냥 결사대라니까 죽기 살기로 싸우는 백제의 병사 중에 어느 누구의 무용담이 이름을 남기었는지 보다 그 처참한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지 생각해보자. 과연 전쟁에서 승전국의 병사와 패전국의 병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는 지.

 

거시기,

영화에서 기억나는 거시기가 세 번 있다.

 

첫 번째 거시기, 죽음을 각오한 계백.

나당연합군이 백제로 향하는 것이 확실해진 상태지만 백제의 호족들은 전쟁참여를 거부하고, 위태로워진 의자왕은 계백을 부른다.

"계백아, 니가 거시기해야 쓰겄다."

계백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이다. 집에 가서 제 처와 자식들을 칼로 베고, 호족들을 위협하여 군사를 강탈하여 계백은 황산벌로 떠났다.

 

그런데,

백제의 멸망은 계백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아니, 계백의 칼을 맞아야했던 그의 처와 자식들에게 나라의 멸망이 어떤 의미였기에 죽음을 각오해야했으며,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남편의 칼을, 아비의 칼을 받아야했을까. 계백을 연기했던 박중훈은 최근 이 역할을 소화하기가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누구와 싸운다는 것은 가장 기초적으로 자신과 혹은 가족을 위해서인데, 가족을 죽이고 무엇을 지키기 위해 결사항전을 하는 지 그 심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정말 힘들었다고 한다.

계백과 그 칼에 맞아 죽은 계백의 가족을 역사가 기억하기는 했다. 이들의 장렬한 죽음을. 하지만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겨야한다며 칼을 드는 계백의 말에 독기를 품은 눈빛으로 그의 처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호랑이는 가죽땜시 죽고, 사람은 이름땜시 죽는 겨."

 

두 번째 거시기, 옥쇄작전.

백제 진영의 작전회의장, 계백은 자신의 갑옷을 실로 꿰매며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벗지 않을 것을 말하며, 모든 병사에게 이를 따르라 명한다. 바로 옥쇄작전이다. 이것을 설명하는 작전회의장, 계백 曰.

"이번 전쟁에서 우리의 작전은 뭐시기할 때 꺼정, 거시기한다"

모든 병사들은 죽기 전에 갑옷을 벗지 못하게 갑옷을 모두 실로 꿰매버리고 만다.

 

하지만,

백제의 멸망은 백제의 병사들에게 옥쇄를 의미해야만 하는 가. 누가 지 왕이든 농사지을 때, 농사짓고, 부르면 불려가는 이들에게 왜 누군지도 모르는 왕의 멸망과 자신들의 옥쇄가 동일시 되어야하는가. 병사들의 걱정은 이게 아니다.

"벼가 영글때가 됐는디, 울 엄니 겁나 고생하겠구먼..."

세 번째 거시기, 민중.

백제의 군대는 전멸하고, 계백과 부장 하나와 병사 하나가 막사 안에 갇히고 말았다. 그리고 부장은 계백을 피신시키기 위해 땅을 파는 데, 계백은 문뜩 자신과 계속 함께 싸웠던 병사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지 이름이 뭐가 중요하요. 그냥 거시기로 해두쇼"

계백은 자기 대신 거시기를 피신시키고 거시기가 도망가는 시간을 위해 단신으로 신라군과 맞서다 죽었다.

 

그래,

거시기는 민중의 이름이다. 뭘 뜻하지도 않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 자체로 어떤 것을 이루고 있는 우리네 민중의 이름이다. 거시기가 도망가 자신의 땅으로 돌아와 농사짓는 어미의 품에 안기며 전쟁이 끝난 것을 기뻐하는 것이 이상한가. 패전국의 병사가 패전으로 인해 전쟁이 끝나고 자신이 고향에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것이 이상한가. 아니, 백제의 멸망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지 않은 것을 그는 통렬해야했는가. 그래, 그것이 역사의 상식이고, 그래서 계백과 반굴과 관창의 이름은 있어도, 거시기는 역사에 없다. 그래도 좋다. 훗날의 이름을 위해 죽느니,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니 말이다.